백범 김구 선생을 가장 존경했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남자, 여운형 선생도 존경했다. 하재완 선생은 4.19 당시 집에 있던 돈을 들고 서울로 가 부상자들에게 나눠주고 온 뒤 통일운동에 뛰어 들었다. 7.4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던 날에는 양조장 주인이었지만 술을 못했던 그가 술을 마시며 덩실덩실 춤을 췄단다.
"좋다고 고향의 봄을 부르고 녹음도 했어요. 그런 걸 보면 남편은 통일을 지향했던 사람인 건 맞아요."
그는 또한 강직한 사람이었다. 곧 감옥에서 나올 줄 알았던 그는 "정치적인 문제니까 절대로 남의 말 듣지 않고 돈 쓰지 말라"고 당부했단다.(…) 당시 하재완 선생은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폐 농양종과 탈장으로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그가 유신독재를 비난하면서 자신을 중앙정보부 과잉충성의 희생양이라고 항거할 때, 그는 남편에게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주석 1)
하재완 열사는 1932년 1월 10일 경남 창녕군 이방면 안리에서 농사꾼 부모 슬하에서 10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모 양가의 집안에 항일운동 등 민족운동에 참여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이방초등학교를 거쳐 해방 이듬해 6년제인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했다. 뒷날 12.12 군부반란과 광주학살을 주도한 전두환과 같은 반이었다.
그는 뒷날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재판을 받으면서 제출한 <항소이유서>에서 자신이 살아온 젊은 날에 대해 진술했다.
피고인은 1947년 4월경 대구공업중학 2년 재학 시 아무것도 모르고 상급생의 강요에 못이겨 대구공업중학교 민주애국학생동맹원으로 가입 중 1948년 3월 하순경 대구지방소년원에서 군정청 포고령 위반으로 3개월 간의 교화 처분을 받고 교화 생활을 받은 사실이 있으나, 당시 피고인의 연령은 16세 소년으로서 아무 사상적 의식도 없었을 뿐 석방 후 정치적 혼란기에 아무 것도 모르고 일시적 잘못을 깨끗이 씻기 위하여 원적지에서 부모 슬하에서 근신, 가사에 종사 중 6.25 동란이 일어나고 동년 7월 모함으로 창녕경찰서에 1개월간 예비 검속된 사실이 있으나 당시 검속된 대부분이 처형되었으나 피고인은 무혐의로 석방된 것입니다.
그 후 군에 지원 입대하여 많은 노력을 하여 육군특무부대로 전속하여 대공사찰의 일선에서 만 5년간 충실히 근무하여 지난날의 일시적 잘못을 완전히 청산하였음으로 금번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무런 사고 없이 살아왔던 것입니다.
1950년부터 모교인 이방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6.25전쟁이 발발하고 7월에 보도연맹사건으로 예비 검속되어 창녕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1개월 후 석방되었다. 그가 보도연맹에 들어간 것인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당할 때 풀려난 것은 미군 CIC 부대에 근무 중인 친척의 도움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하재완 열사는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와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단국대학 야간부에서 정치경제학을 수학했다. 1958년 이영교와 결혼하고 대구에서 육촌 형이 운영하던 양조장 일을 도우며 생계를 꾸렸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