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임금은 임진왜란 초반에 북쪽으로 피난 가기에 바빴다. 이 때문에 그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군주의 이미지를 갖게 됐다. 그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그가 도성을 버린 1592년 6월 9일(음력 4.30)에 극적으로 표출됐다. <선조실록> 수정판인 <선조수정실록>은 "어가가 나가자, 난민이 대거 일어났다"라며 "경복·창덕·창경의 3개 궁이 일시에 다 불탔다"라고 기술한다.
선조는 그처럼 분노의 대상이었지만, 임금 자리는 무사히 지켰다. 권력욕이나 뻔뻔함으로도 설명될 만한 일이지만, 그것으로는 다 되지 않는다. 희생양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인당 지도자인 서애 유성룡이 책임을 떠안은 것이 선조를 지키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었다.
출세 가도 달린 유성룡
유성룡은 임진왜란 50년 전인 1542년에 경상북도 의성에서 출생했다. 그가 과거시험에 최종 합격한 시점은 보수세력인 훈구파가 역사 무대에서 퇴장하기 직전이었다. 그는 22세 때인 1564년에 1단계 과거시험인 소과를 통과하고, 2년 뒤 대과에 급제했다. 이듬해인 1567년에 선조 임금이 즉위하면서 개혁세력인 사림파(유림파)의 세상이 열렸다.
유성룡은 의성 북쪽인 안동을 기반으로 했던 퇴계 이황(1501~1570)의 제자다. 이황을 따르는 사림파 선비들은 동인당을 구성했다. 이들은 동인당 내에서 남인 계열을 형성했다. 유성룡은 이황의 제자였기 때문에 훈구파 정권하에서라면 탄압이나 차별을 받기가 쉬웠다. 그러나 운 좋게도 과거급제 이듬해부터 훈구파의 퇴장을 목격하게 됐다.
장관급이 되기 전에 그는 상주목사 같은 목민관도 역임했지만, 승문원·예문관·춘추관·홍문관·사간원·사헌부 같은 학자 스타일의 관청에 주로 근무했다. 임금이 주는 유급 휴가를 받고 학문에 전념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전을 누리기도 했다.
15세기 후반부터 훈구파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단일 대오를 유지했던 사림파는 훈구파를 퇴장시킨 뒤에는 자신들끼리 당쟁을 했다. 유성룡은 그 당쟁의 결과로 자신이 속한 동인당이 1582년 이후에 서인당을 제치고 집권당이 되는 과정을 목격했다.
1589년에는 같은 당 소속의 정여립이 역모사건에 휘말리면서 동인당이 정권을 잃고 핍박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화를 피했다. 선조는 서인당의 정철을 앞세워 동인당을 무력화시키면서도 유성룡과 이산해 같은 동인당 인사들을 보호했다. 서인당이 너무 과한 힘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2년 뒤인 1591년, 정권은 다시 동인당에게 돌아갔다. 서인당 지도자 정철이 눈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다가 임금의 진노를 사면서 서인들이 타격을 입었다. 이는 서인들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동인당이 남북으로 분당되는 계기가 됐다. 정당해산심판제도가 있었다면 서인당 해산심판이라도 추진했을 만큼 강경 대응을 주문한 동인들은 북인당이 되고, 크게 보면 정치 동업자인 서인들에 대한 온건 대응을 촉구한 동인들은 남인당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