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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명성황후의 편지... 20대 중국 관료의 충격적 행태
2025-07-05 10:22:38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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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일본 식민지가 되기 전에 청나라 식민지가 될 뻔했다. 1882년에 임오군란을 진압하겠다며 군대를 파견한 청나라는 상황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병력을 주둔시키며 내정과 외교를 좌지우지했다.

청나라는 불평등조약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해 자국과 조선의 상하 주종관계를 규정하고(장정 전문), 조선 문제를 관장하는 자국 북양대신에게 조선 군주와 대등한 위상을 부여했다(제1조). 또 고문들을 파견해 조선의 정부 조직 개편에 개입했다. 이때 파견된 고문 중 하나가 전 독일 영사인 묄렌도르프다.

청나라는 자국 군대를 동원해 조선 청년들을 훈련시키고, 조선 유학생들을 자국에 불러들여 교육을 시켰다. 자국 무기도 조선군에 공급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1905년 을사늑약부터 1910년 국권침탈 사이에 일본이 한국의 자주권을 억압한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었다.

임오군란 이후의 청나라에서는 조선 병합론도 제기됐다. 군사 4500명을 이끌고 상륙한 수군사령관인 광둥수사제독 우장칭(오장경)의 막료인 장졘(장건)은 조선을 중국에 편입시키는 내용을 담은 조선선후육책(朝鮮善後六策)을 조정에 건의해 강경세력인 청류당의 지지를 받았다. 4년 뒤인 1886년에는 청나라의 조선 현지 책임자인 위안스카이(원세개)도 조선 병합을 건의했다. 고종 임금이 청나라를 몰아내고자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했다는 첩보에 대한 대응 차원이었다.

고종 무시한 위안스카이의 위세


1882년 이후에 청나라가 파견한 조선 현지 책임자들 중에서 위안스카이는 사실상 조선의 왕과 다를 바 없었다. 1859년에 출생한 그가 우장칭을 따라 조선에 오기까지의 이력이 <역사비평> 2009년 봄호에 실린 구선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의 논문 '조선을 근대 식민지로 만들려 했던 중국인, 위안스카이'에 이렇게 요약돼 있다.

"위안빠오종(袁保中)의 넷째아들로 허난성 시앙츠엉시엔에서 태어나, 곧 숙부인 위안빠오칭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두 번에 걸쳐 향시에 응시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마침 양부 위안빠오칭과 막역한 사이였던 우장칭이 그의 재주를 인정하고 휘하에 거두어들임으로써(1880) 무관이 될 수 있었다. 이로써 장차 우장칭과 함께 조선에 오게 될 인연이 마련되었다. 1882년 임오군변 때 우장칭이 청군 인솔자로 임명받게 되자, 위안스카이도 그의 막료로서 함께 조선에 와서 임오군변 진압에 앞장서게 되었던 것이다."

청나라 말기의 막료(幕僚)는 고위 관료을 사적으로 보좌하는 특이한 공무원이었다. 23세 때인 1882년에 그런 신분으로 조선에 온 위안스카이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1884)을 진압하며 국제적 주목을 끌다가 현지 책임자인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상사의가 됐다. 벼락 승진을 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친청나라 세력을 조선 조정에 심으면서 내정·외교를 농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곱 살 많은 고종 임금 앞에서 상하 예법도 갖추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90도 굽혀 세 번 절하는 삼국궁(三鞠躬)을 하지 않고, 두 손을 모은 채 허리 구부리기를 세 번 반복하는 삼읍례(三揖禮)로 대체했다. 대등한 사람을 대하듯 고종을 대하는 이런 행동은 국제적 항의와 비판을 초래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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