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40여 년 만남을 이어온 네 명의 친구들이 있다. 지난 5월 열렸던 첫 개인전 '찬란한 인생' 전시를 준비할 때 가장 중요한 재료이자 주제였던 혼례복을 아낌없이 기부해 준 친구들이다(관련 기사 : 교사 36년 퇴직 뒤 처음 연 개인전... 참 '찬란한 인생'입니다 https://omn.kr/2dml).
친구들이 전시를 보러 온 지난 5월 24일, 인천 근교에 있는 내 작업실로 초대했다. 친구들에게 작업실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컸고 묻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주보'. 결혼식 절차가 간소해져서 요즘에는 생략하는 경우가 많지만 예전에는 사주 단자와 청실홍실, 기러기, 패물 등을 넣은 예단함을 신랑 측에서 신부 측에게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이때 신랑의 사주를 적은 종이인 사주 단자는 청홍색 보자기에 곱게 싸서 보내기 마련인데, 바로 친구들의 한복 사이에 바로 그 보자기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사주보는 크기도 작으니 혹시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어하지는 않을까?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 작품에 사용하게 되면 가위질을 피할 수 없는지라 한 번은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혼례복도 유행이 있었나봅니다
작업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친구들의 관심은 이내 내가 중고장터에서 업어온 자개농 속에 넣어둔 혼례복으로 모였다. 아직 작품이 되지 않은 한복을 꺼내 함께 보면서 까마득하게 잊었고 살았던 사람들과 기억을 떠올리느라 작업실은 잠시 시끌벅적해졌다. 혼례복도 유행이 있는지, 신기하게도 나를 비롯한 세 친구의 두루마기는 모두 붉은색 계열이었다.
그중 민영이의 두루마기는 단연 시선을 사로잡았다. 강렬하고 열정적인 배색의 두루마기였다. 아주 고운 빨강의 겉감에 안감으로는 보색인 초록색을 넣어 지은 것이다. 초록도 그냥 초록이 아니라 선명하기 이를 데 없다. 또 안섶에는 마치 양복처럼 옷 주인의 이름을 수놓았다. 노란색 실로 얌전하고 꼼꼼한 손바느질로 세발 뜨기한 단 처리도 인상적이었다.
이 한복을 지은 분은 원래 양장을 하던 분이었단다. 양장 디자이너로 제법 성공했는데, 시대가 변해 기성복이 나오고 맞춤 양장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한복으로 진로를 변경하였다고 했다. 지금은 한복조차 대여점에서 모두 해결하는 시대가 되어 동네의 작은 한복점도 하나씩 사라지고 있으니 격세지감이라고 할 밖에.
두루마기 안주머니에 이름을 수놓은 것은 양장을 하던 방식을 적용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던 주황에 초록의 배색이라니, 얼마나 대담한가. 두루마기를 입고 길을 나서면 걸음걸음에 두루마기가 팔락거릴 때마다 언뜻 보였다 사라지는 초록 빛깔은 또 얼마나 얼마나 싱그럽고 매력적으로 보였을까?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