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칠 광주진보연대 집행위원장, 광주비상행동 상황실장, 오늘 인터뷰이의 공식(?) 직책이다. 이렇게 그를 소개하는 이유는 공식 직책에 해당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역할을 광주에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시민사회지원센터에서 처음으로 제정한 활동가상에 이름을 올렸을 때 광주에서는 아마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그가 가장 큰 성과라고 꼽는 옛 전남도청 복원 투쟁과 현재의 복원대책위 활동, 박근혜퇴진 촛불, 5.18 단체, 기관, 왜곡 관련한 대응 활동을 가장 앞장서서 해왔고 지역의 현안이 터지고 그에 관련하여 대책위를 꾸릴 때, 시민사회든, 단체 내에서든, 사적인 관계에서든 크고 작은 고민이나 갈등이 생겼을 때, 누구라도 가장 먼저 떠올리고 찾게 되는 이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날카롭고 정무적인 판단이 필요하거나 여러 사안들이 얽힌 일도 원만하게 해결하는 능력을 갖췄는가 하면 다양한 분야에 대한 풍부하고 종합적인 지식과 의견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조언과 조력을 마다하지 않는다(그래서 함께 활동하는 지역에서는 ''홍박사'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를 대하든 진실되고 겸손하고 꾸밈없이 대하는 한결같은 성품 덕에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이 많을 수밖에... 오죽하면 우리 지역의 어르신이 '안 그래도 쪼끄만디 닳아져불겄어. 그만들 불러"라는 안타까운 탄식을 했을까.
나는 가까이에서 활동하는 실무자로서 앞서 말한 활동가상 추천서류 양식을 맞추기 위해 활동 사진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놀랐다. 정말 사진이 없어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겨우겨우 소통방들을 뒤지고 가까운 몇몇 기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쪽 귀퉁이에 담긴 사진까지 넣어 마무리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 곳에라도 손 보태고 머리를 맞댔지만 스스로를 빛내기보다 낮추는 사람, 내가 보는 그의 모습이다.
12월부터 3월까지 상황실장이라는 직책으로 광장을 꾸려오는 동안, 광장의 요구,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한 논의의 시작부터 할 말 많으신 광주의 어르신들을 모시는 일, 함께 해준 실무자들의 고된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고 집회 설비 등을 아낌없이 내어준 업체 관계자들을 챙기는 일까지, 집회가 끝난 후 거리와 광장을 정리하고 마지막 쓰레기 봉투를 묶는 일까지... 큰 일도 거침없이, 작은 일도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대학시절 '활동가로 살아야 되겠구나'고 결심"
- 꽤 오랜 시간 활동가로 살아오셨는데 얼마나 되는지, 언제부터 어떤 활동을 했는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오랜 활동 중에 가장 성취감을 느꼈거나 중요한 변화나 성과를 만들어 낸 경험이 있다면?
"활동가란 개념을 인지하고 '나는 활동가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대학 2학년 정도부터, 그러니까 35년 정도 활동가로 살아왔네요. 우리가 아무래도 광주니까 1년 중 상반기는 온통 5·18진상규명을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날마다 시내에 나가 거리투쟁하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생이라기보다는 활동가로 살았고 활동가가 되어 갔죠.
당시에는 아직 군부독재의 끄트머리에 있었고 5.18민중항쟁의 직간접적 경험으로 인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운동은 군부 독재 타도와 민주화 쟁취를 뚜렷한 핵심 목표로 함께할 수 있었어요. 80년대의 학생운동은 이전 시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가두시위 중에 초코파이가 대열에 뿌려지거나 최루탄 연기와 백골단의 추격 속에서 학생들에게만 열렸다 순식간에 닫히는 상가의 셔터 등 전설같은 미담들이 꽤 많았죠. 학생들은 대학을 넘어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등 사회 취약 계층과의 연대를 모색하며 사회 변혁의 주된 동력으로 인정받고 있었고 그렇기에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이 따로 구분되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학생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당연하게 자신을 활동가라고 여겼던 것 같아요.
성취감, 성과? 많았죠. 가장 처음으로 겪은 것은 대학 3학년 때 어용교수, 무능 교수 퇴진 투쟁을 해서 2명을 몰아낸 것이었어요. 학우들의 반응도 뜨거웠죠. 아, 이런 게 투쟁이고 운동이구나 느꼈습니다.
제가 다닌 조선대학교는 그냥 사립대학교가 아니었어요.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민립대학이고 수많은 소액 기부가 모여 세워진 진정한 의미의 민립대학으로, 그 설립 정신은 현재까지도 조선대학교의 중요한 정체성으로 남아있습니다. 제가 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에 있었던 1987년 1·8 항쟁은 바로 이러한 민립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최근에는 5·18 최후 항쟁의 역사적 공간인 옛 전남도청을 9년의 장기 투쟁의 결과로 올 12월에 1980년 5월의 모습으로 원형이 복원되게 하는 투쟁입니다. 옛 전남도청이 무안으로 이전하면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옛 전남도청이 훼손되었는데 어쨌든 이게 국책 사업이고 이미 완공된 사업이었기 때문에 도청 복원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이걸 뒤집고 도청을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된다고 확신했어요. 그냥 도청을 공개하면 될 거다라는 믿음이 있었고 이 최후 항쟁의 현장을 그대로 공개해 버리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던 거죠.
5.18 민중 항쟁 이후로 이 옛 전남도청 복원 투쟁이 광주 전남 시도민, 민·관·정이 하나가 되어 뭔가를 시도하고 목적을 이룬 최초의 사례에요. 오월 단체 등 경험자뿐만 아니라 광주광역시청, 전남도, 시도의회, 교육청, 시민사회 할 것 없이 함께 했으니 말 그대로 명실상부 범시도민 공동체를 만들어냈기에 가능했고 이번 탄핵 건으로 복원의 정당성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이어진 박근혜 퇴진 촛불과 함께 우리 광주진보연대가 지역에서의 몫을 인정받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12.3계엄과 윤석열 파면 투쟁을 겪으면서 끈질기게 잘 싸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