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완승은 1979년 6월 25일 박정희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고려대 학내 시위를 주동하여 구속되었다. 그리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10.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살해되고 유신체제는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백완승 일행은 구속 취소로 풀려났다.
'서울의 봄' 현장 뒤덮은 탈춤 공연
백완승은 대학 3학년 때부터 추진해온 일이 하나 있었다. 가리봉동 야학을 하면서 우연히 도시산업선교회에서 하는 집회에 가서 '진오귀굿'을 관람했다. 그는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백완승은 '운동'이라는 것이 지식인들이 선호하는 이론, 이념, 학습 이런 것들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노동 현장의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문화'가 필요하고, 특히 서로 몸을 부대끼며 '놀이'를 하는 과정이 중요했다. 그것이 바로 당시 대학가에서 유행하던 '탈춤'이었다.
당시 고대에는 탈춤을 하는 문화패가 없었다. 백완승은 고대에 문화패를 조직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그래서 민속학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민속학연구회를 공식 서클로 등록하는 일은 학교당국과 수사당국의 벽에 막혀 이루지 못했고, 그러던 와중에 시위 주동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풀려난 백완승은 다시 이 일에 전념했다. 때마침 10.26사건 이후 대학가에서는 학생회 부활을 추진하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고, 1980년 봄 학기가 되자 민주화를 위한 집회와 시위가 대학가를 휩쓸었다.
백완승은 민속학연구회를 이끌고 박정희 정권을 풍자하는 '궁정동 말뚝이'(궁정동은 박정희가 시해당한 청와대 인근의 안가가 위치한 곳)라는 제목의 창작 탈춤극을 만들고 각종 집회와 농성장 현장에서 공연을 했다. 주인공 말뚝이는 주로 백완승이 맡았다.
1980년 5월에만 무려 30회 공연을 할 정도로 쉴 틈이 없었다. 특히 1980년 5월 15일, 그 유명한 '서울의 봄' 서울역 앞 시위가 이루어진 날에는 각 대학이 학교에서 출정식을 한 뒤 가두로 진출해서 서울역 앞까지 행진했다. 이날 고대 출정식은 정문 앞 광장에서 열렸는데, 학생 1만 명에 전투경찰 1만 명 도합 2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백완승이 연출한 '궁정동 말뚝이'가 공연됐다. 백완승 인생 최대의 공연이었다. 지금도 고려대 민주동문회에서는 백완승은 '백대장' 혹은 '말뚝이'로 불린다.
운명의 5월 15일 서울역 집회는 '회군'으로 정리되고 말았지만, 고대에서는 회군에 굴하지 않고 다음날인 5월 16일 학교에서 대규모 학생이 운집한 가운데, 박정희 유신체제를 청산하자는 뜻에서 '5.16군사쿠테타 장례식'을 거행한다. 이때 장례식 공연을 백완승이 이끄는 민속학연구회가 맡는다. 원래는 상여를 메는 퍼포먼스만 있었는데 백완승은 상여를 불태우는 장면을 연출하기로 한다. 하지만 상여는 대여한 것이고 가격이 무려 1백만원에 달했다. 백완승은 비싼 상여를 치워버리고 합판과 종이박스로 가짜 상여를 만들어 꽃으로 장식한 뒤 공연에서 활활 불태워 결정적 장면을 연출했다. 백완승은 길이 없다면 어떻게든 만들어내고 돌파하는 '대장'이었다.
흉골 조각난 성북경찰서 고문
백완승의 전성시대도 잠시, 다음날 5월 17일 '계엄 전국 확대'로 전두환의 쿠데타가 실행되고 수사관들이 백완승 집을 덮친다. 백완승은 아파트 베란다에 있는 작은 창고에 숨어 위기를 모면한다. 다시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집요한 수사관들은 가족들을 닦달했고, 먼 외가 친척집에 숨어 있던 백완승은 검거되고 만다.
당시 고대 출신으로 신계륜, 박계동, 조성우, 설훈 등 많은 이들이 수배되었던 상황에서 백완승이 가장 일찍 잡혔다. 단연히 백완승에게 나머지 사람들의 소재를 대라고 추궁했고, 모른다고 하자 고문이 시작되었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코에 물을 붓는 최악의 물고문도 당했다. '통닭구이'라는 고문이 있다. 철제 책상 두 개 사이에 대를 걸쳐놓고, 두 손을 뒤로 묶은 뒤 그 대에 끼워서 매달아 놓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고통 끝에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백완승의 몸이 퉁퉁 부어오르자 매다는 것도 어려워졌다. 그러자 아예 널브러진 백완승을 책상 위에 눕혀놓고 그 몸 위에 올라가 발로 밟았다. 머리는 책상 끝 밖으로 밀려 제껴졌는데 그 얼굴에 수건을 덮고 물을 부었다.
몸이 성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때 흉골이 부숴져 조각이 났다. 나중에 교도소로 이감되었을 때 지속적으로 가슴에 통증이 왔다. 물고문을 받을 때 숨이 차서 코로 물이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때 폐에 물이 차서 그런가 했다. 나중에 석방되고 전문의에게 검진을 받고 비로소 흉골이 부러진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