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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만 남은 성곽 찾아가다 떠올린 75년 전 8월의 아버지
2025-08-11 13:48:13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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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작열하는 나날이다. 가만있어도 땀이 뚝뚝 떨어지는 이런 날에 전쟁터로 간 청년들이 있었다. 1950년 8월 10일, 땡볕이 내리쬐는 신작로를 걸어 신병 집결소로 간 아버지는 이후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숨 가쁘게 전장을 달렸다.

물밀 듯이 쳐내려온 인민군에게 서울은 물론이고 충청도며 전라도까지 다 빼앗겼다. 남은 것은 대구 인근과 경남, 부산뿐이었다. 경북 청도군은 전쟁과는 떨어져 있었다. 전쟁이 났다는 소문은 들렸지만 전쟁과는 무관한 듯 일상이 흘러갔다. 그래도 청년들은 자위대를 조직해서 마을을 돌봤다.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조를 짜서 차가 다니는 큰 길을 지켰다. 21살 아버지는 그렇게 지내다 전장으로 갔다.

더리미 마을 뒷산에 있는 가리산돈대를 찾아간 지난 7일은 매우 더웠다. 정수리에 내리 꽂히는 땡볕을 받으며 걷노라니 아버지의 그해 여름이 떠올랐다. 더구나 돈대 근처에 있는 '위수령항동위령탑'을 보자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위령탑이 전쟁 때 돌아가신 분들을 위로하고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위령탑에서 읽는 비극의 시대

해방 이후 6.25전쟁까지 우리나라는 좌우로 나뉘어 서로 싸우고 죽였다. 강화도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발발 며칠 뒤 강화도는 인민군에게 점령 당했다. 그들은 우익 인사들을 체포하고 구금했다. 그해 9월 10일의 인천상륙작전으로 강화도의 인민군은 철수했다. 철수하던 인민군은 우익 인사들을 연행해서 학살했다.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해변가 산기슭에서 73명의 우익 인사들이 무참히 학살 당했다.

10월부터는 한국군과 민주청년반공돌격대 등의 우익 자경단이 강화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민군에 부역한 인사들을 체포, 구금했다. 강화향토방위특공대라는 이름으로 자경단을 만든 우익단체는 한국군과 미군의 비호를 받으며 만행을 저질렀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1.4후퇴를 하기까지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는데, 15일 동안 5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가리산돈대 아래 있는 '위수령항동위령탑'에는 강화특공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위한 부분은 없다. 인민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우익 인사들과 전쟁에 나가 죽은 전사자들 그리고 청소년 유격대 전사자들을 추모하고 기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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