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중년의 두 남녀, '수환'과 '영경'은 마지못해 참석한 지인 결혼식 뒤풀이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다들 술에 만취해 쓰러진 자리에서 수환은 물끄러미 그들을 응시하고, 영경은 홀로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다가 쓰러지길 반복한다. 깨어 있는 이가 둘뿐이자, 영경은 수환에게 곁으로 오라고 한다.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이름을 묻고, 또다시 술을 들이붓던 영경은 술상에 고개를 쳐박고 쓰러진다. 수환은 그런 영경을 업고 밤길을 걸어 그녀의 아파트에 내려놓은 후 떠난다.
그 인연으로 둘은 그들만의 술자리를 갖는다. 영경은 만취해 다시 상에 머리를 박고, 수환은 전처럼 다시 영경을 등에 업은 채 밤길을 걸어 집에 데려다준다. 세 번째 술자리에서 둘은 각자 살아온 과거를 서로에게 들려준다. 그들은 공통점이 있다. 결혼은 실패로 끝났고, 그 과정에서 믿던 이에게 배신을 당하고 좌절한 신세다. 영경은 마음속 공허를 달래고자 술에 의존하고, 수환은 지병으로 평범한 사회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다.
또 다른 공유점이 있다. 백세시대라지만 둘 다 앞으로 어찌 살아갈지 아무런 목표도 계획도 갖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죽음은 오히려 그들 곁에 늘 대기하고 있다. 그래서 더 익숙하고 적응도 가능해 보인다. 그런 공통점을 확인한 둘은 함께 살기로 한다. 하지만 그들의 동거는 새로운 삶을 모색하거나 하는 거창한 꿈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다가올 종말의 시간까지 각자의 슬픔을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존재와 함께 하고 싶을 뿐이다.
김수영에서 권여선, 다시 강미자를 거쳐 완성된 '봄밤'
제목은 '봄밤'이지만, 흔히 단어에서 연상되는 느낌과 영화 속 '봄밤'의 질감은 무척 다르다. 물론 두 주인공은 아직 따뜻하고 눈이 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봄의 제전을 맞이하진 못했어도, 아직 서늘한 밤바람 속에서 봄날이 다가오는 조건이란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독특한 기운은 어디에서 유래한 걸까? 그 원점은 시인 김수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적지 않은 이들이 애송하고 필사하는 그의 시 '봄밤'은 영화 속 영경의 입을 빌려 꾸준히 반복된다. 봄날의 첫사랑과는 간격이 까마득한, 세상 풍파 다 겪을 대로 겪은 상처를 품은 이들 간에만 교감할 법한 그런 질박한 감정이 묻어나는 시다. 그런 묵직함 때문에 굳이 이 디지털 만능 시대에 애써 손으로 직접 써보게 시도하는 것이리라.
그런 시의 함의는 소설가 권여선의 동명 소설로 재탄생한다. 영화는 원작의 내용을 크게 각색하지 않고 고스란히 화면에 옮긴다. 시의 정조가 소설로 구현되고, 그 소설을 시각화한 결실이 영화 <봄밤>의 세계인 셈이다. 같은 정설을 공유하는 어떤 응어리진 존재의 각기 다른 단면이라 봐도 좋겠다.
기조와 방향성이 명징한 원작에 충실한 영화화답게, <봄밤>은 흔히 동 세대 독립영화가 취하는 전형을 상당 부분 벗어나 있다. 영경은 국어교사라는 괜찮은 직업을 가졌고 자기 소유 아파트도 보유해 경제적으론 큰 어려움이 없지만, 파국으로 끝난 결혼생활은 물론, 양육권을 빼앗긴 상실감으로 도저히 멀쩡한 정신 줄을 유지할 수 없다. 술을 벗 삼고, 시 '봄밤'을 마치 절규하듯 읊조리는 것 말곤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한 지 오래다. 자력으론 벗어날 수 없는 중증 알코올 중독자가 영경의 현실이다.
수환의 인생 역정도 파란만장하다. 20살부터 '쇳일'로 산전수전 겪은 그는 작지만 건실한 철공소를 운영했지만, '단가 후려치기'로 갑질하는 거래처의 횡포로 끝내 파국을 맞았다. 엎친 데 덮친다고 남은 재산은 아내가 빼돌려 잠적해 버렸다. 게다가 젊을 때 무리를 많이 했었는지, 류머티즘 관절염이 닥쳤다. 몸만 건강하면 제 한 몸은 어찌 건사하련만, 신용불량자로 추락해 떠돌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이 겪은 사회저 부조리를 소리 높여 성토하고, 그들의 불행을 시사적인 맥락과 연결해 풀이하지 않는다. 불합리한 양육권 처리, 원청 기업의 갑질 같은 쟁점을 고발하는 식으로 사회비판과 공적/사적 영역의 순환 같은 맥락을 풀이하는 게 흔한 방법론으로 자리 잡은 한국 독립영화계에서 오히려 드문 절제와 방향성일 테다.
초로하고 처참해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두 사람
당연하다는 듯 남들 다 구사하는 간단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굳이 활용하지 않는 영화는 무엇을 보여주려는 걸까? 그들이 세 번째 술자리에서 끄집어낸 각자의 전사('前史')는 그저 두 사람의 현재 상태를 납득하도록 돕기 위함에 그친다. 이미 두 사람은 흔히 '정상화' 시도에 도전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 사람이 천재지변이나 전쟁 같은 극한의 주변 상황에 내몰리지 않은 상황에서 겪을 법한 불행의 극점에 떨어진 지경에서, 애써 불행의 조건을 소상히 해설하고 관객에게 공분과 동조를 주문할 계획이 애초 없다. 굳이 맞장구를 쳐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꺼낼 기력도 없는 주인공들이다.
대신에 영화는 비록 그것이 장및빛 미래, 혹은 밤이 지나면 찬란하게 떠오를 태양의 기운과는 동떨어져 있음에도 주인공이 서 있는 위치 너머를 응시한다. 물론 세간의 선입견대로라면, 자기 앞가림도 기대하기 힘든 '알루(알코올&루머티즘) 커플'에게 '밝은 미래'란 그들이 사회로 돌아오기 위한 뼈를 깎는 노력으로 '갱생'하는 과정, 즉 '기적' 같은 가능성 외엔 마련될 수 없다. 오히려 지독하게 현실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게 <봄밤>의 방향성이다. 희박한 행운을 바라는 건 그냥 관객 자신이 불편을 감내하기 싫은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듯, '알루 커플'은 그들 앞에 놓인 운명을 향해 봄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