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마크
오마이뉴스
넘사벽 천재 이을호, 스스로 운동권이 되다
2025-07-01 12:06:42
민청련동지회
  •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 카카오톡으로 공유하기
  • 트위터로 공유하기
  • url 보내기
이을호는 1955년 전북 부안군 하서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영로는 동학의 일파인 태을교 교주였다고 한다. 증산교 교주 강증산이 진인으로 불렀을 정도로 도가 높았다. 아버지 이중학도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동학에도 조예가 있었고, 앉아서 천리를 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식견이 높았다.

일찍이 자신은 세상일을 다루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호를 세무제(世務齊)라 짓고, 세속의 일에 힘썼다. 면장을 20년이나 역임했고, 재산을 많이 모아 부유하게 살았다. 풍수지리에 밝아 풍수 좋은 곳에 여기저기 넓은 땅을 마련했고, 이 땅들을 해방 후 토지개혁 때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부자였지만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고 살아서 6.25 때도 좌익들에게 잡혀갔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배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조숙해진 이을호

어머니 김남근은 후처였는데 이중학과 결혼하여 이을호와 이원호 형제를 낳았다. 어머니도 초혼이 아니었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사별한 전 남편은 빨치산 운동을 했다고 한다. 부모님 제삿날 집에 돌아와 사람을 만나다가 밀고를 당해 경찰들의 총탄 세례를 받고 벌집이 되어 죽었다. 남편을 잃고 딸 둘을 데리고 온갖 장사를 하면서 근근히 연명을 했고 마지막에는 거의 걸인이나 다름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주변 사람들이 다리를 놓아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에게는 본처가 있었다. 이 본처에게 이을호의 배다른 누나가 다섯, 배다른 형 둘이 있었다. 어느 날에는 집안에 슬픈 일이 일어났다. 이을호가 열 살 때, 3년 아래인 일곱 살 먹은 유일한 친동생 이원호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이을호는 평생 그 동생을 잊지 못했고, 틈이 나면 가족들에게 그 동생이 어떤 아이였는지 이야기하곤 했다.

2등과 20점 차이 전교 1등생

이을호는 1961년 부안 하서국민학교에 입학했다가 2학년 때 정읍 고부국민학교로 전학해서 67년 졸업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전주북중에 시험쳤지만 낙방했다. 고부중학교에서 장학생으로 오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웬일인지 이을호를 중학교 진학을 시키지 않고 집에서 한학 공부를 하도록 했다. 한학에 조예가 있던 아버지는 영민한 아들과 사서삼경, 그 중에서도 [대학(大學)]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놓고 깊은 토론을 자주 하였다.

주위에서 고등학교에 갈 것을 권유하여 이을호는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강의록으로 준비했다. 3년 반을 준비한 끝에 1970년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 검정고시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기까지 이을호는 폭넓은 독서와 아버지와의 토론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키워갔다.


1971년 3월 이을호는 호남의 명문 전주고등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이을호의 천재성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입학 후 첫 시험에서만 전교 720명 중 2등을 했을 뿐 이후 졸업 때까지 3년을 내리 1등을 했고, 그것도 2등과의 격차가 평균 20점 이상 나는 압도적 1등을 했다. 그렇다고 학교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검정고시 준비하는 시기 동안 중학교 과정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전 과정을 이미 다 섭렵한 터라 시험공부를 따로 하지 않았고, 그 대신 도서관의 수많은 책들을 독파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진로를 철학으로 결정하게 된다.

이을호의 천재성은 학교 성적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이을호는 '고전독서회'와 '부름' 이라는 이름의 독서모임에도 참여했는데, 이 모임들에서도 항상 시대를 앞선 진보적인 생각을 이야기해서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2년 10월에 대통령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위한 '10월유신'을 단행했다. 그 직후에 전주고등학교에서 채수찬(후에 17대 국회의원), 소병훈(후에 20,21,22대 국회의원), 박경희(후에 지양사 출판사 운영) 등 의식 있는 3학년 학생들이 주동하여 유신반대 시위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교사와 교직원들의 적극적인 저지로 시위가 초동에 저지되었지만 3명의 학생이 제적되고, 여러 명이 무기정학 등 징계를 받았다.

이을호는 이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이을호는 그 뒤에 독서회 등에서 뜻이 맞는 친구 몇 명과 학내시위를 모의하고, 실제 구체적인 준비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정에서인지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천재의 정신 세계, 신비주의로 치닫다

전체 내용보기
주요뉴스
0포인트가 적립되었습니다.
로그인하시면
뉴스조회시 포인트를 얻을수 있습니다.
로그인하시겠습니까?
로그인하기 그냥볼래요
맨 위로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