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1월 12일에 부산에서 박종철 선배가 올라와서 13일에 학교를 갔더니 성적표 종이가 쌓여있었어요. 성적이 좋지 않으니 우리는 안 찾아갔거든요(웃음). 그런데 이 착한 사람이 '애들이 이거 찾으러 오기 귀찮을 텐데 내가 가져다줘야지'하고 학교에서 자기 하숙집 가는 길에 사는 친구와 후배의 성적표를 다 들고 나와서 배달해줬어요."
87년 1월 13일 자정 즈음, 이현주 박종철센터 센터장은 하숙집을 찾아온 언어학과 선배 박종철을 만났다. 이날은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이 센터장의 동생이 올라와 있었는데 '우리 동생이 왔는데 맛있는 거 사줘야 한다'며 영하 13도의 추운 날씨에 지금의 박종철 거리 입구 인근 2층 카페로 이들을 데려갔다.
"그날 카페에서 정말 깔깔깔 웃으며 즐거웠어요." 그렇게 즐거웠던 그날, 이 센터장은 그날 선배 박종철과 약속을 했다. '서로 잘못하는 게 있어서 우리 꼭 무조건 힘이 되어주고 용서해주는 사이가 되자'고. 당시 학생운동을 계속 해도 되는지 고민하던 이 센터장이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선배 박종철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고민이 많았던 그 시기, 하숙집에 성적표를 전해주러 찾아온 선배 박종철을 보면서 이 센터장은 생각했다. '평생 이 선배를 믿으면서 함께 운동해야겠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을 향하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하숙집으로 바래다주려는 선배의 모습이 그렇게나 외로워보였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선배 박종철을 바래다주겠다고 나섰다가 괜히 '흰소리 하지마라'라고 한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박종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 골목이 정말 선명했어요. 그 골목 딱 절반만 가로등이 있어 불빛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머지 절반은 아주 깜깜했어요. 정말 깜깜했어요. 그때가 1월 14일 새벽 2시에서 3시 정도였어요."
그리고 9시간 후인 1월 14일 오전 11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박종철 군은 남영동 대공분실 5층 조사실 509호에서 물고문 끝에 사망했다.
암울했던 시대, 민주주의를 향한 청년 박종철의 이야기
지난 19일, 민주화운동기념관 개관을 기념하는 시민강좌 '남영야학(夜學): 다시 민주주의'의 첫 번째 강연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을 만나다'가 열렸다. 언어학과 후배인 박종철센터 이현주 센터장이 연사로 나서,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의 죽음 이전, 민주화운동가 박종철의 삶과 정신을 시민들과 나누었다.
이현주 센터장은 1984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한 박종철 열사의 학창 시절 이야기로 말 문을 열었다. 박종철은 학교 선배이자 학생 운동을 하는 친구들을 교육시키는 지하 서클인 '대학문화연구회'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박종철 열사가 어떻게 시대와 마주하면서 민주주의를 향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는가"라는 과정을 담담하게 전했다. 특히, 박종철은 대학에 와서 학생 운동을 시작했지만 교내 시위와 학교 밖 가두 시위에도 한 번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성적인 운동가였다고 회상했다.
거리 시위에 나섰다가 잡혀 구치소에서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나온 뒤 가족들과 계곡으로 놀러 갔던 사진, 집에서 잠옷으로 갈아 입은 사진 등 대공분실의 영정 사진이 아닌 평범했던 청년 박종철의 모습도 화면에 드러났다. 이 센터장은 "학생 운동을 한다는 것은 나의 주장을 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나의 삶과 미래를 희생하겠다는 의미였다"며 당시 학생 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의 무게감을 설명했다. 이 센터장은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가장 가슴 아팠던 사람이 이한열 열사가 아니었을까"라며 시대 정신이었던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을 희생하며 올바른 길로 나아가려 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남영동 대공분실, 인권 유린의 현장에서 피어난 저항
강연에서 이 센터장은 박종철 열사가 희생된 남영동 대공분실의 실체와 그 의미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그는 남영동 대공분실이 "독재 권력의 정권 유지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무서운 공간"이자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고 다시는 저항하지 못하도록 모든 의지를 꺾기 위한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2000년대에 박종철 열사가 사망한 509호를 제외한 나머지 5층의 시설들이 훼손되었고, 2001년 1월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 훼손된 시설을 보고 경찰들에게 크게 화를 내고 호통을 쳤던 일화는 당시 독재 정권의 만행 이후에도 계속된 가족들의 고통을 보여준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박종철 열사의 사망 시간 조작 시도였다. 경찰이 사망 시간을 11시 30분으로 하고 용산 중앙대 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한 것으로 하자고 지시했다는 내용과 박종철 열사가 사망한 1월 16일에 가족들이 부검과 시신 인계를 요구했음에도 경찰이 시신을 강제로 화장했던 일, 강제 화장 후에도 경찰은 시신 인계를 거부하며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것은 남영야학 참여자들에게도 공분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