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국가는 무얼 했는가? 대구형무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흔한 독립기념관 하나 대구에는 없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결심하노니,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대구형무소 역사관을 재현할 것이다. 대구에 독립운동기념관을 반드시 만들 것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시작하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삼남(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방의 투사들이 투옥되고 순국한,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감옥이었던 대구형무소는 현재 대구 삼덕교회로 바뀌어 있다.
이곳은 이육사 시인이 투옥돼 수인번호 264번을 달고 첫 옥고를 치른 곳이다. 경북 안동 출신인 저항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 지사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가담한 죄목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3년 여간 옥고를 치렀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는 판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경술국치로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일제의 관리자는 되지 않겠다"며 판사직을 사임하고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설립해 독립운동 거점으로 삼았다. 박 의사는 비밀결사단체인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워 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러냈다. 그는 1918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21년 대구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