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사는 남편이, 미국과 영국에 사는 아들과 딸이 한국 방문 일정을 맞추었다. 누구의 생일도, 기념일도 아니었다. 내 어머니, 아이들이 외할머니를 '더 늦기 전에 찾아뵙고, 함께 손을 잡아드리자'라는 마음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가족과 떨어져 나 혼자 어머니 간병을 한 지 8년째다. 그동안 네 식구가 4개국으로 흩어졌다. 아이들은 각자 시간이 허락될 때 잠깐씩 한국을 방문했지만, 올해 들어 달력이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어머니 얼굴은 부쩍 희미해져 갔다. 하루가 다르게 쇠잔해지시는 만큼, 가족들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외할머니 보러 비행기 타고 날아온 가족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특별했다. 아이들이 지구별에 새 생명으로 내려온 그날부터였다. 어머니는 마치 오랜시간 기다려온 사람처럼 품에 안아 씻기고, 기저귀를 갈아주시며 작은 울음에도 귀를 기울이셨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땐 작은 손을 꼭 쥐고 한 걸음씩 세상으로 이끌어주셨고, 나날의 밥 숟가락속에, 학교 가는 뒷모습 속에 늘 당신의 손길이 배어 있었다. 그 사랑은 대가도, 언약도 없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거친 세상 속에서 부딪치고 주저앉을 때, 할머니의 따뜻한 말 한 마디는 부드러운 담요처럼 아이들의 마음을 감싸주었다.
"괜찮다! 넌 잘하고 있다!"
그 한 마디는 아이들이 다시 걸음을 떼는 용기가 되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조건없는 사랑 속에서 점차 한 사람의 모양을 배워갔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모든 나날 속에 조용히 스며든 사랑을 안고 먼 길을 달려왔다.
오랜 비행과 시차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곧장 요양원으로 향했다. 접수를 마치고 기다리는데 땀인지 긴장인지 손바닥이 젖어들었다. 초침 소리가 귀에 붙어 뛰는 순간이었다. '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복도 끝에서 휠체어가 밀려나왔다. 앙상한 어깨, 가느다란 팔, 아이들은 바람처럼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