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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부 '포기'한 고3 아들... 이 한 표가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2025-06-03 14:38:41
이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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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21대 대통령선거 선거공보와 투표 안내문이 집으로 도착했다. 남편, 나, 그리고 이제 막 만 18세가 된 아들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투표안내문 용지를 들여다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우리 아이도 드디어 유권자가 되었구나.' 2007년, 황금돼지띠 해에 태어나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서 시작된 생이, 이제는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5년 제21대 대선에서는 만 18세 유권자가 전체 유권자의 약 5%에 달한다. 이들은 흔히 'Z세대'로 분류되는 세대로, 디지털 네이티브이자 기존의 정치 프레임에 갇히지 않는 감수성과 비판 의식을 가진 세대로 주목받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이들의 표심을 잡기 위한 다양한 시도와 공약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 '현장'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유권자가 된 아이들의 현실은 기대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내 아이의 하루 역시 그러했다. 아침 7시 등교, 수업 시간 내내 졸음과 싸우며 내신을 관리하고, 방과 후엔 곧장 학원으로 향한다. 일주일에 6일, 국·영·수에 과학, 제2외국어까지 이어지는 학원 일정과 주기적으로 치러지는 모의고사, 수행평가, 생기부(생활기록부) 관리를 위한 각종 비교과 활동까지. 한국의 고등학생은 학습 노동자이자 입시 경주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하루는 투표나 정치에 대한 고민보다는 "오늘은 몇 시에 자야 내일 덜 지칠까"와 같은 생존의 문제에 훨씬 더 가깝다.

교육부의 '고등학교 교육과정 운영 실태 조사'에 따르면, 서울과 수도권 지역 고등학생의 평균 학습 시간은 하루 11시간을 넘는다. 그 중 자율적인 탐구나 시사·사회 문제에 대한 학습은 매우 제한적이다. 또한, 입시 중심 교육체제 속에서 '정치'는 종종 '시험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분류되며, 학교 교육 현장에서는 공론장이나 비판적 시민 교육의 기회가 여전히 부족하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만 18세의 유권자들이 '합리적이고 책임 있는 판단'을 내리길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구조적으로 무리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한 표를 행사할 권리를 손에 쥐었다. 그는 단지 아직 말할 시간이 부족했을 뿐, 생각하지 않는 존재는 아니다. 지금은 바쁜 하루를 살아내느라 조용한 시민일지라도, 언젠가 이 사회의 방향을 바꿀 결정을 내리는 목소리로 성장할 수 있기를, 부모로서 나는 희망한다.

아들은 고등학교 1학년 때 학생회와 방송부 활동을 병행했다. 단순한 '스펙 쌓기'가 아니었다. 교내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또래들과 소통하며 협력하는 과정 자체가 그에겐 살아 있는 '시민 교육'이었다. 점심시간을 쪼개어 회의에 참여하고, 방송부실에서 친구들과 나누던 날 것의 대화들, 매주 아침 조회 방송을 위해 학교의 주요 이슈를 정리해 대본을 작성하던 시간들은 모두 그에게 소중한 경험이었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학교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나의 목소리를 내는 일. 그것은 그의 삶에 자율성과 책임감을 불어넣는 일이었다.

하지만 2학기 중반, 그는 결국 활동을 내려놓았다. 매주 쏟아지는 수행평가 일정, 모의고사와 내신 준비, 방과 후 학원 수업과 과제까지 겹치자 하루 24시간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회의 도중에도 졸음을 참기 바빴고, 대본을 쓸 시간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학생회 활동도, 방송부 대본도, "중요하긴 하지만 지금은 안 되는 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의 경험은 개인적인 아쉬움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치 참여의 싹이 자라기도 전에, 과도한 학업 경쟁과 시간 부족은 학생들의 자발적인 시민 경험과 참여 기회를 체계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자율'과 '참여'를 강조하는 교육 담론과 현실의 괴리가 여실히 드러나는 지점이다.

이러한 현실은 교육부가 2023년 발표한 '학생 민주시민 교육 실태조사' 결과에서도 확인된다. 전국 고등학생 1만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해당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71.4%가 '학교에서 정치와 사회 문제에 대해 충분히 배우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 학생들의 민주시민 역량을 길러줄 수 있는 토론, 모의 선거, 정책 제안 활동 등도 대부분 '시간 부족'과 '입시 부담'을 이유로 학교에서 활발히 운영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사회과 과목은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학교와 교사의 재량에 따라 정치·사회 주제의 수업 편성이 크게 달라진다. 입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민주시민 교육'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결과적으로, 법적으로는 '유권자'가 된 18세 청소년들이 실질적인 정치적 역량이나 판단력을 기를 기회는 구조적으로 박탈당하고 있는 셈이다.

아들이 학생회에서 했던 경험, 방송부 대본을 작성하며 고민했던 문제의식은 분명 그를 자라게 한 씨앗이었다. 하지만 그 씨앗이 싹트고 뿌리내릴 시간을, 지금의 교육 현실은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교실은 민주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정치는 어른들만의 일이 아니다. 정치는 결국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일이자, 우리 모두의 삶에 깊이 닿아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훈련장은 어디여야 할까? 바로 교실이다. 교실은 민주주의가 처음 숨 쉬어야 할 공간이자, 가장 작은 공론장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교실은 그런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고등학교에서 '참정권'을 배운다는 것은 주로 시험을 위한 정의를 암기하는 일에 그친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문장을 외우지만, 정작 그 꽃을 피우기 위한 토양이 되는 '참여의 경험'은 턱없이 부족하다. 아이들은 교과서 속 정치제도를 익히지만, 실제로 자신의 목소리가 학교 안에서 의미 있게 반영된다는 경험은 거의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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