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65년~ 1967년 대구의 어느 사립 고등학교에 다녔다.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근로 장학생이란 이름으로 학비를 면제받았다. 고3 때 키가 크고 성실하게 보였는지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의 형식적 동의를 얻어 나를 반장으로 임명했다.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 때였다.
그해 5월에 대통령선거가 있었고 6월에는 총선이 있었는데 군인 출신 박정희와 그의 당이 압승했다.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는 기억에서 사라졌는데 대학이 시끌시끌했고 우리 고등학교도 3학년 임원들 중심으로 어느 친구 집에 모여 데모를 모의하고 준비했는데 거사 당일 정보 유출로 실패하고 정학 처분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 상황이 지금 되돌아보면 내 고등학교 때의 최대의 정치행위였는데 과정의 어설픔이나 결과의 참담함 때문인지 내 기억의 창고에 보관하기도 싫었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교사가 된 뒤에도 학생들을 가르침이나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나도 모르게 가두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스스로 의식화된 교사로 자처하면서도 말로는 자주적 어쩌고 하면서도 활동 영역을 아주 협소하게 제한했다. 울타리는 아주 작게 견고하게 쳐 놓고 그 안에서만 뛰어놀아라 했으니 학생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고등학생 운동사> 출판기념회 축사를 요청 받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생 운동'이란 말이 아직도 낯설고 줄임말 '고운'은 더욱 그랬다. 기억하기 두려운 몇 명의 이름도 떠올랐다. 이창진과 김소연.
정치적 행동은 대학가서 해라: 징계와 오해가 싫었다
이창진이 신일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이 된 1986년은 나에게도 특별한 해였다. 그해 나는 서울 YMCA 교사회 회장으로 교육운동에 참여하여 5월 10일 전국의 교육운동 동지들과 함께 교육민주화선언을 한 해였다. 해직 위기에 몰렸으나 신일고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는데 그때 이창진은 내가 담당하고 있던 문예반 학생이었다. 그 당시 국어 교사로는 영화 평론하는 변인식 선생, 뒤에 영화감독이 된 이창동 선생 등 있어서 학생들에게 영향이 많았던 것 같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과 이어 펼쳐진 노동자 대투쟁 시기를 거치며 나는 자주적 교원단체인 전국교사협의회를 결성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는데 창진이 등 문예반 학생들도 나름 고등학생 차원에서의 민주화운동을 고민했던 것 같다. 어렵게 창진이를 비롯한 몇몇이 나를 찾아와서 조언을 구했던 것 같은데 내 코가 석 자라 많은 시간을 내서 성실하고 진지하게 대해 주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 제도나 분위기에서 고등학생으로서의 사회 활동의 한계와 어려움을 얘기하며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으니 먼저 대학 갈 준비를 착실히 하고 그런 사회 정치적 문제는 대학 가서 제기하고 행동해도 되지 않겠냐며 은근히 자제하도록 설득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학생들이 행동으로 나설 경우 필연적으로 닥칠 학생들에 대한 불가피한 징계 등 불이익이 걱정이 됐고, 그보다도 일부 운동권 교사가 부추기고 선동해서 학생들이 움직인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육의 주체는 교사 학생 학부모라고 하면서도 학생의 주체성을 너무 무시했던 것 같다. 참교육 운동에 모든 교사가 나서지 못한 것처럼 학생들도 먼저 각성한 학생들이 선진적으로 나서는데 그것마저 무시하고 인정하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당시 고등학생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학생들과 더 진지하게 고민하며, 교사 학생 학부모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적절한 역할을 담당하며 함께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결국은 고등학교 학생운동만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며 사회적 인정도 받지 못하고 결국 그 과정과 결과도 망각의 늪에 깊이 수장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