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은 제주도의 어머니와 같은 산이다. 한라산이 있음으로 해서 섬이 생겼고 그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주는 한라산의 일부이다. 제주의 모든 것은 한라산으로 집중된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아주 오래전 용암으로 들끓던 한라산은 이제 아픈 역사를 이겨내고 아름다운 풍경을 뽐내며 육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요즘은 외국 관광객도 부쩍 늘어났다.
한라산 굼부리는 거의 완벽하게 타원추의 꼭짓점에 위치하고 있다. 평면적으로 보면 피라미드 형태와 흡사하다. 굼부리의 위치가 조금만 기울어졌다면 남태평양의 군도나 하와이 군도의 여러 섬처럼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이스트 섬을 보더라도 분화구는 아예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 말이다. 한라산의 이런 기하학적 균형은 대자연이 내려준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것도 부족해 대폭발 후 새끼화산을 만들어 지형의 다양성을 창출하였고 그곳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적당한 공간이 되었다.
이날 가야 할 트레일은 바로 한라산 굼부리와 가깝게 접해 있는 사라오름이다. 당초 사라오름은 이번 계획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으나 트레킹 도반 중 한 명이 그 오름을 강력하게 추천하여 마지막에 결정하였다. 이번 제주 트레킹의 본래 취지 중에 하나가 가능하면 한라산 정상부에 가깝게 접근한 트레일을 배제하는 것이었는데, 이 결정으로 인해 다른 도반이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었다.
사라오름은 해발 1,324미터이고, 정상인 동봉으로부터 3.8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한라산이 보듬고 있는 오름 중에서 사람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오름이 윗세오름이지만, 물을 담고 있는 오름은 사라오름이 유일하다. 날씨에 따라 오히려 백록담보다 더 많은 물을 보유하는 경우도 있고 특히 잘 마르지 않는다.
대다수의 등산객들은 한라산 백록담에 만 집중할 뿐 이 사라오름의 존재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대개 하산하면서 잠시 들러야 하는데 표고차 100미터를 극복하기엔 체력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엄두를 못 내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올 4월 26일, 두 번째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들머리와 날머리는 성판악이고, 사라오름까지 왕복거리는 약 12킬로미터이며, 표교차는 550미터이다. 서귀포에서 281번 버스를 탄 나와 일행은 성판악 정류장에서 내려 주차장을 지나 탐방로 입구로 이동하였다. 어제 좌보미-영주산 트레킹을 했음에도 도반들에게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성판악에서 동봉에 이르는 코스는 한라산 등반 여러 코스 중에서 가장 쉽고 짧아서 많은 사람들로 항상 북새통을 이룬다. 한라산은 육지 산들과는 달리 등산객들만 오는 것이 아니라 관광객들이 기념으로 오르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에 항상 몸살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몇 년 전부터 예약제로 바뀌어 약 두 시간 간격으로 2~3번에 나누어서 등산객들을 분산 출입시키기 시작했고, 하루 출입 인원을 2,000명 이하로 조절하였다. 그리고 자연보호 차원에서 윗세오름과 남벽에서 넘어오는 코스도 차단하였다. 한편으론 불편하지만 한라산국립공원의 이런 극약 처방은 충분히 이해를 구할 수 있었다. 한라산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들로부터 수난을 당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상대적으로 예약자가 가장 적은 마지막 타임에 예약한 나와 일행은 텅 빈 등산로를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길은 잘 다듬어져 있었다. 경사가 완만한 길은 데크와 코코매트를 깔았고, 경사각이 큰 길엔 단단한 돌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수많은 발자국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몸부림이 처절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런 보호 차원의 관리를 하지 않는다면 길은 교통호처럼 깊게 파이고 무너질 것이다. 더구나 한라산 특유의 거대한 폭우가 퍼부을 경우엔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육지처럼 자연휴식년제를 적용시키는 것은 제주도의 관광 수입 감소가 물 보듯 뻔하기 때문에 섣불리 시행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틈을 노린 개발론자들은 설악산 사례를 보고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게 오히려 자연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상대할 가치가 없어 보인다. 아무튼 현재의 한라산은 피곤에 절어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초반부 등산로는 평균적으로 완만하고 한적했다. 아마도 두어 시간 지나면 첫 타임에 올라갔던 사람들이 쏟아져 내려올 게 분명했다. 빼곡한 자연림으로 둘러싸인 그 길을 따라 한 시간 이상 올라가면 속밭 대피소가 나온다. 나와 일행은 잠시 그 대피소에서 간식을 먹고 다시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역시나 경사가 심해지고 돌계단도 많아진다. 그리고 숨도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