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의 어머님은 이제는 노환으로 큰 병원과 요양 병원을 오가며 지내시는 처지가 되셨다. 이제는 기저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생활하셔야 하는 처지임에도 가끔 간병사 분들의 대우가 당신 뜻에 맞지 않으실 때면 역정을 내시곤 한다. 그 역정의 근간에는 내가 누구인데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대우하느냐 하는 노여움이 담겨 있다.
'내가 누구인데'의 그 누구라 함은 그 시절에 대학을 나오고, 학교 선생님을 하셨다는 의기양양한 자부심, 꺾일 수 없는 자존심 같은 것들이다. 어머님이 그런 모습을 보이시면 그게 언제적 이야기인데 싶어 면구스럽기가 이를 데 없다. 그런데 60 고개 언덕을 넘노라니 그 어머님의 '내가 누구인데'가 남의 얘기가 아니었음이 깨달아진다.
홀로 되어 빵집 알바를 시작할 때만 해도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시절이 시절이라고, 그 알바 자리도 녹록지 않아졌을 때 나는 지난 시절 내가 살아왔던 이력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았다. 오랫동안 독서 논술 교사를 해왔던 경험, 아이들을 가르쳤던 시간들이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배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로 이어졌다. 그리고 비록 산 넘고 물 건너였지만 군부대 장병들과 책을 매개로 만날 수도 있었다. 뒤늦게 배운 그림책으로 성인 인문학 수업도 해보았다. 꾸준하게 이어왔던 나의 시간들이 이렇게 보답받을 수도 있구나 하고 스스로 감동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