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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구의 시신 해골과 뼈로 장식한 성당, 왜 이랬냐면
2025-06-07 19:22:29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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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을 지나 상 프란시스쿠 성당으로


리스보아 관광을 마친 우리 일행은 테주강을 건너 동쪽으로 이어진 A6 고속도로를 탄다. 이 길은 포르투갈 알렌테주를 동서로 관통해 에스파냐의 바다호스(Badajoz)로 이어진다. 리스보아에서 에보라까지는 140㎞로 1시간 30분쯤 걸린다. 리스보아에서부터 흐릿하던 날씨가 에보라에 도착할 때쯤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에보라 왕궁 주변 주차장에 차를 멈춘다. 그리고는 레푸블리카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간다. 에보라 항소법원에서 푸블리코 공원으로 들어가면 에보라 왕궁을 만날 수 있다.

에보라 왕궁은 상 프란시스쿠 수도원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상 프란시스쿠 왕궁이라 불린다. 또 마누엘 1세 국왕이 이곳을 왕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마누엘 1세 왕궁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마누엘 1세는 대항해시대 향신료 무역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큰 부를 이루었기 때문에 곳곳에 왕궁, 성당, 수도원을 짓도록 했다. 그의 명령으로 에보라 왕궁은 1502년부터 1520년까지 확장과 리모델링과 건설을 이어갔다. 이때 왕궁, 왕비실, 왕자실, 도서관, 갤러리, 병원, 정원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간의 전쟁(1640~1668)으로 왕궁이 심하게 파괴되었고, 관리의 주체가 다시 상 프란시스쿠 수도원이 되었다. 1865년 왕궁은 고고학박물관, 극장, 전시홀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16년 화재로 파괴되었고, 1943년 복원을 거쳐 국가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왕궁이 박물관과 갤러리로, 부속건물이 에보라 대학 건물과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에보라 대학은 1559년 포르투갈 역사상 두 번째 대학으로 문을 열었다. 제수이트 교단에 의해 운영되었고, 퐁발 후작의 제수이트 교단 탄압으로 1779년 문을 닫게 되었다. 그리고 200년 후인 1979년 에보라 대학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왕궁의 정원을 지나 상 프란시스쿠 성당으로 가는 길에 바스쿠 다 가마 동상을 볼 수 있다. 왼손으로 닻을 내리고, 오른손으로 지구본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연두색 신록과 자주색 꽃잎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동상이 돋보인다. 동상을 지나 5월 1일 광장으로 들어서면 동쪽으로 상 프란시스쿠 수도원 성당, 인골 경당, 성당 박물관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수도원 성당으로 들어간다. 수도원은 1475년 고딕양식으로 지어지기 시작해 1550년대까지 마누엘 양식이 더해져 완성되었다.

상 프란시스쿠 성당 이야기


성당 정면에서 보면 7개의 아치가 보인다. 그런데 아치가 무어양식, 로마네스크 양식, 고딕양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아랍이 지배하던 시절부터 로마네스크와 고딕시대를 거치면서 건물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성당 안쪽으로 들어가면 천장의 볼트를 통해 성당이 고딕양식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정면에 지성소가 있는데, 제단이 르네상스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 제단 왼쪽 합창대석의 제단은 바로크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 제단이 예수와 성인들 조각으로 이루어졌다면, 측면 제단은 조각과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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