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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번쯤 외우고 오십 번쯤 종이에 쓴 시
2025-06-07 11:38:47
이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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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편이 온몸에 전율을 일으킬 때가 있다. 마치 세포 하나하나가 떨리는 듯한 감흥, 저절로 숨이 멎듯 감탄이 터지는 순간-그럴 때 시는 영혼을 흔든다. 사춘기 시절, 조지훈 시인의 '사모'를 읽고 난생처음 영혼마저 뒤흔들리는 강렬한 경험을 했다. 그 시는 단번에 마음을 파고들었고, 외운 구절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무의식처럼 입가에 맴돈다.

피 끓던 시절에는 사랑과 이별에 관한 시가 감성을 적셨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숱하게 겪는 동안 이성 간 사랑에 대한 감수성은 시나브로 무디어졌다. 그런 내 마음에 불을 지핀 여인을 만난 건, 불혹을 지나고 몇 해를 더 보낸 때였다. 잊고 지냈던 감정의 심지가 다시 타오를 만큼 강렬했다. 그녀의 이름은 이옥봉, 나를 흔든 시는 '몽혼'(夢魂)이었다.

近來安否問如何 (근래안부문여하) 요즈음 임께서는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月到紗窓妾恨多 (월도사창첩한다) 달빛이 사창에 어리면 첩은 한이 많습니다.
若使夢魂行有跡 (약사몽혼행유적) 만약 꿈길에도 발자취가 남는다면
門前石路半成沙 (문전석로반성사) 임의 집 앞 돌길의 반은 모래가 되었을 것이외다.


이토록 사무치는 그리움이라니! 이옥봉의 '몽혼'은 마치 벼락처럼 내 영혼을 깊이 뒤흔들었다. 조지훈의 '사모'를 달달 외웠던 사춘기 때의 열정이 솟아나, 옥봉의 시를 백 번쯤 외우고 오십 번쯤 종이에 썼던 것 같다.

40대 중반, 옥봉의 비극적 사랑과 시적 재능에 매료되어 단숨에 이 글의 초고를 썼다. 20여 년이 흘러 고희를 바라보는 지금, 다시 꺼내 본 글에서도 그때의 뜨거운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녀의 삶이 주는 강렬함, 시가 가진 애절함에 깊이 공감하며 마치 그 시대를 살았던 것처럼 글을 써 내려갔던 것 같다.

그즈음 옥봉의 시에 흠뻑 빠져 있던 어느 날 밤, 꿈에 바닷가에서 소복을 입은 여인을 보았다. 멀리서도 그 여자가 옥봉임을 직감했고,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재촉하여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익숙한 얼굴. 놀랍게도 내 아내와 닮아 있었다.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옥봉이 환생하여 내 아내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다가,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장난삼아 '옥봉 여사'라고 불렀다. 아내는 천재 여류시인의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주는 것에 내심 싫지 않은 듯했다. 물론, 환생한 옥봉 여사가 뛰어난 시재는 가지지 못하고 괴팍한 성질만 가지고 환생한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덧붙이기도 했다.

비극적인 사랑과 시인의 혼

이옥봉의 생애는 한 편의 비극시와 같았다. 그녀의 아버지 이봉은 전주 이씨 왕족으로, 선조 때 옥천군수를 지낸 인물이었다. 어머니는 관기 출신이었고, 당시의 신분 질서에서 옥봉의 앞날은 관기로 살거나 첩이 되는 것이 운명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고 글을 가르쳤다. 열일곱에 양반가에 시집보내 안온한 삶을 기원했지만, 운명은 또다시 그녀를 저버렸다. 남편은 결혼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시댁도 기울었다. 옥봉은 친정으로 돌아왔고, 이후 한양에서 시인 묵객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조원이란 선비를 만나 마음을 빼앗겼다. 정3품인 승지 벼슬을 지낸 조원은 율곡 이이와 함께 진사시에 장원할 정도로 수재였고, 외모 또한 출중했다고 전해진다. 옥봉은 그를 사무치게 사랑했지만, 조원의 반응은 냉랭했다. 첩이 되겠다고 자청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인연을 잇고자 아버지 이봉이 나섰다. 인맥을 총동원한 끝에, 조원은 '더는 시를 짓지 않겠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그녀를 첩으로 받아들였다. 어쩌면 그는 세간의 화제가 되는 옥봉의 시를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당파싸움으로 시 한 구절이 빌미가 되어 화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문자옥(文字獄)의 시대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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