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넘게 독일 베를린에 살면서 독일식으로 표현하자면 베를린을 내 '조끼 주머니 속'처럼 훤히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조끼 주머니에서 이야기를 꺼내려니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조금 막막하다. 해리 포터 이야기 속 헤르미오네가 들고 다니던 요술 주머니를 기억하시는지. 그처럼 꺼내도 꺼내도 이야깃거리가 남아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우선 실마리를 찾아야 하니 뒤적뒤적해 본다.
지난 5월 한국을 다녀오며 튀르키예(터키)의 이스탄불을 경유했다. 공항에서 환승을 기다리는 동안 면세점에서 티셔츠를 한 장 샀는데 결제할 때 베를린행 탑승권을 보여주었더니 젊은 튀르키예 여직원이 반색하며 물었다. "베를린에 사세요?"
그렇다고 하자 눈을 반짝이며 자신도 얼마 전에 베를린에 다녀왔는데 너무 좋아서 또 가고 싶다고 했다. 뭐가 그렇게 좋았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손까지 휘저어 가면서 "그냥 다 좋았다"를 반복하며 사람 좋게 웃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슷한 반응을 자주 접하기 때문이다.
베를린은 그런 곳이다. 물론 볼거리도 많고 문화예술 이벤트도 다차원으로 제공하고 있어 누구나 각자 취향에 따라 골라서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냥 다 좋다고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많은 이들이 베를린을 편안한 곳으로 느낀다. 특히 젊은 층이 선호하는 도시여서 독일 통일 이후 베를린으로 이주해 온 인구의 70% 이상이 35세 이하의 젊은이들이다.
대도시임에도 편안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누구나 스며들 수 있는 도시'라는 점 때문이다. 관광객도, 외국인 거주자도, 유학생도, 난민도 그대로 흡수되어 같은 빛깔로 물드는 도시. 예로부터 이주자들이 많았던 베를린은 토박이 비율이 낮다. 그래서 토박이들의 텃세도 없다. 요즘 같아선 토박이들이 오히려 밀린다.
170여 개국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도시
베를린은 물론 국제도시이다. 그러나 베를린의 진정한 국제성은 유럽 정치의 중심지라거나, 세계적 수준의 문화와 예술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베를린은 전 세계 오대양 육대주 사람들이 다 살고 있는 다문화 도시라는 용어만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도시다. 외국인 비율 자체는 24.5%로 독일의 다른 도시에 비하면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다만 2025년 현재 170여 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북적이며 함께 사는 중이다. 거의 유엔 수준이다. 그저 다녀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주자로 등록된 사람들이다.
수십 년 전에 취업차 이주해 온 튀르키예 사람들 비율이 지금도 가장 높고 시리아, 우크라이나 등 전쟁 피난민도 수만 명이 정착해 살고 있다. 1980년대 초 이란에서 호메이니 독재를 피해 넘어온 대학생들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 통일 후엔 루마니아, 폴란드, 러시아 등 구동구권에서 살길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흘러들어왔다.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 전쟁이 일어났던 곳의 난민들도 속속 피난 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