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갯마루에선 한여름 바람마저도 살을 에듯 날카롭다.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세우려던 한 사내와 수십만 민중의 꿈이 여기서 꺾여서이다. 사내와 그들이 끝내 넘지 못한 우금티다. 그 후 맞닥뜨릴 통탄의 역사를 예비했을까? 1894년 겨울은 처절하고도 모질었다.
작금 우리는 이 고개를 넘어섰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치 떨리는 분노를 감내하고 있으니 말이다. 가급 한겨울에 이 고개를 넘고 싶었다. 2024년 12월 불어온 내란 광풍을 이겨내자는 심정에서다. 그것이 공주를 만나는 참모습이라 생각했다.
신록 가득한 고갯마루에서 사위를 둘러본다. 길게 늘어선 급경사 산들이 마치 태산준령 같다. 고을의 동-남-서를 산이 빙 둘러막았으니, 공들여 성벽을 쌓을 무슨 까닭이나 있었을까?
산에 갇힌 도시가 한줄기로 뻗었다. 도로와 물길이 나란하다. 이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금강을 향해 함께 흐르고 달린다. 골짝마다 집과 건물이 오밀조밀하다. 좁은 공간이 높은 건물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마지막 충청감영 도시다. 감영을 성곽에 가두지 않았고, 따라서 곳곳에 관청과 민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이괄의 난을 맞은 비겁한 왕이 허겁지겁 도망쳐왔다. 난이 평정되었음에도 한참을 돌아가지 않았으니 공산성 풍경에 반했을까, 인심이 후했을까, 그도 아니라면 천하의 겁쟁이였을까. 고려 현종도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치듯 몽진했으니, 공주가 방어는 물론 살기 좋은 고장이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옛 지도를 들고 성안을 누비려 한다.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제민천을 따라 웅진로가 뻗었고, 공산성 못 미친 곳에 무령로와 '十'자로 교차하는 공간구조다. 옛 관청 자리와 현재 학교의 관계를 명확히 살필 수 있을까? 모든 게 어림짐작이니, 이것이 걸으며 즐기는 참맛이다.
교육도시 공주
우금티 아래가 공주여고-공주사범대학이다. 연이어 유명한 야구선수를 배출한 공주고등학교가 지척이다. 여길 지날 때마다 유머 넘치는 재담에 길게 내뱉는 "몰러 유~우~"를 연발하시던, 공주사대 출신인 고교 때 역사 선생님이 생각난다.
옛 지도에 '중남정'이 보인다. 지금의 공주시청 자리일까. 위치는 어림하나, 면적이나 규모로는 자신할 수 없다. 본관(本官)이라 기록된 곳이 공주고등학교 자리임은 가늠할 수 있겠다. 1922년 설립되었으니, 개연성은 충분하다.
1950년대 들어선 사대부고가 '선화당' 터임은 널리 알려져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다만 옛 감영은 1896년 충남·북이 분리되고 1910년 충남도청이 들어서면서 훼철되었다. 옛 지도에도 명확한 '포정사'를 최근 복원했다.
그 앞이 감영 길이니, 수백 년이란 시간 권력의 중심축이었으리라. 길은 이제 쇠락을 넘어 고즈넉한 재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제민천을 '대천'으로 표기하였고 그 물길을 건너는 다리를 '대통교'라 하였으니, 규모보다 지명에 덧붙인 권위가 훨씬 더 커 보임은 봉건의 잔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