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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마리씩 찾아오는 '부산 백조의 호수' 사라질 위기"
2025-05-08 13:20:13
신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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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눈을 떠 보면 달빛이 이슬비처럼 내릴 때도 있어요. 알아요? 실타래가 풀리듯 내리는 달빛! 종종거리며 먹이를 찾는 도요새 무리의 그림자가 지나가듯 보이기도 해요. 어떨 땐 이놈들이 자고 있는 내 옆으로 잡힐 듯 정말 가까이 오기도 해요."

박중록 습지와새들의친구 운영위원장을 만나러 가기 전, 강과 새를 위해 싸워온 그의 이야기를 담은 책 <물길과 하늘길에는 주인이 없다>(홍정욱, 푸른나무)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멈췄다. 그리고선 그가 낙동강하구 무인도에서 판초만 입고 밤을 지새우는 장면을 상상했다. 끊임없이 부딪히는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쏟아지는 별빛을 받고 있는 사람 곁을 지키고 있는 새들의 모습. 상상만으로도 충만해지는 이런 장면들을 놓을 수 없어서 그가 30년 가까이 생태운동에 몸담고 있을까. 답을 듣기 위해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쓰레기 매립지 찾았다가 갯벌의 매력에 빠져

지난 3월 말, 부산역 근처에 있는 습지와새들의친구 사무실에 들어서자 박 운영위원장은 곳곳에 놓인 소품들을 소개하느라 바빴다. 다 사연이 있었다. 대교 건설로 파묻혀버린 해변의 돌, 천성산과 내성천을 지키려고 온몸을 내던진 지율스님을 응원하는 종이학 등등. 그가 '고니의 삶을 지켜주세요' 등이 적힌 고니 그림엽서들을 바닥에 펼쳐놓았다.

"낙동강하구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25년 전 하고 어째 하나도 안 바뀌고 똑같습니다. 을숙도대교 만들 당시에 가르치던 예쁜 소녀들이 '지켜주세요' 하면서 이래 만들어주셨는데 아직도 못 지키고 있습니다."

습지와새들의친구가 2000년 10월 창립했으니 그가 습지 지키기에 나선 지도 25년이 넘었다. 1988년부터 부산 대명여고에서 생물을 가르쳐온 그는 1996년 만들어진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아래 환생교)에 함께하면서 습지에 눈을 떴다. 환생교 생태기행으로 주남저수지, 우포늪 등을 탐방하면서 물이 있는 모든 땅을 가리키는 습지가 우리 생명과 연결돼 있음을 깨달았다. 특히 낙동강이 1300리를 흘러와 태평양과 만나면서 만들어진 낙동강하구의 아름다움은 그를 사로잡았다.


"낙동강하구에 처음 갔는데 세상에 이리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사실은 쓰레기 문제의 심각성을 확인하기 위해 학생들과 쓰레기 매립지로 유명한 을숙도를 찾은 터였다. 그런데 깊숙이 들어가서 만난 을숙도 남단은 끝 간 데 없이 갯벌이 펼쳐지고 고둥과 게들로 뒤덮여 있었다. '지구의 콩팥'답게 갯벌이 땅에 숨을 불어넣고 있었던 것. 그 뒤 주말이면 낙동강하구 곳곳을 누비면서 여름이면 철새들의 먹이인 새섬매자기가 가득한 초록벌판이 되고, 가을이면 황금벌판을 드러내는 갯벌을 만났다.

한반도 핵심 생태계 지역의 파괴를 볼 수 없어서

"강의 끝이자 바다의 시작이고, 바다의 끝이자 강의 시작"인 낙동강하구는 단순히 생태적 가치가 높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한 곳이다. 동양 최대의 철새도래지로 이미 1966년 문화재보호구역(천연기념물 제179호)으로 지정된 이후 문화재청, 해양수산부, 국토교통부, 환경부 등 정부 4개 부처가 각각 다른 법으로 보호할 정도로 한반도 핵심 생태계이다.


"1966년은 자연보호도, 철새도 모르던 때이지 않습니까? 그런 시기에도 이 땅만은 지키자고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던 대단한 땅입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땅이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파헤쳐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 낙동강하구의 중심인 을숙도를 가로지르는 명지대교 건설과 명지주거단지 아파트 고층화 계획을 접하고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1999년 습지보전법이 제정된 이후 습지보호지역 안을 관통해서 이루어지는 첫 번째 대규모 개발계획이었다. 그런데도 환경단체들도 나서지 않자 환생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습지와새들의친구를 꾸렸다. 상처입고 있는 땅에 "다시 사람과 자연이 화해하고 공존하는 기운이 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을숙도에서 발족식을 했다. 그렇게 명지대교(2009년 완공 후 을숙도대교로 명칭 변경) 저지투쟁에 나섰다.

낙동강하구살리기시민연대를 결성해 2001년 3월부터 2006년 대법원 최종 판결까지 명지대교 건설 반대운동을 이어갔다. 대한민국의 민낯을 그대로 확인하는 날들이었다. 주요 언론엔 부산시의 주장이 주로 실렸다. 명지대교 건설 무효소송 때는 법정에서 다리 건설이 새들에게 미칠 영향을 증언해 줄 국내 학자를 찾지 못 해서 일본 기러기보존회 회장에게까지 부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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