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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이소선 어머니와 어깨를 나란히 한 이 사람
2025-05-04 11:34:05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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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전자 노동조합은 1990년 임투(임금인상 투쟁)를 맞아 4월 10일부터 18일까지 전체 조합원 교육을 실시했다. 4월 17일부터는 잔업을 거부하고 사물놀이 연습과 교육을 병행했다. 19일에는 생산현장과 지원 부서를 순회하며 '90임투 승리'를 위한 구호와 노래를 불렀다.

돌아온 것은 직장폐쇄·구속

4월 25일 1차 교섭에 공장장이 위임장을 갖고 협상 대표로 임했다. 노조는 사장이 협상에 직접 참여할 것을 요구하며 27일 철야농성을 하고, 28일 쟁의 발생 신고를 결의했다. 5월 12일 조합원 개인별로 유인물을 작성해 현장 벽에 부착하는 등 전 조합원들의 투쟁 열기가 뜨거웠다.

노조는 5월 23~24일 텐트를 치고 철야농성을 했는데, 라인별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및 구호 제창·장기자랑·캠프화이어·촛불의식을 진행했다. 5월 29일 사장이 노조사무실을 방문해, 전 조합원 앞에서 회사 측 입장을 설명하고 노조의 대폭 양보를 요구했다.

이에 전 조합원이 철야농성을 선언하고 식당을 개방해 줄 것을 회사에 요청했지만 회사는 식당 문을 폐쇄했다. 회사 측은 일방적으로 협상 결렬을 선언했고, 8일 직장폐쇄신고를 냈다. 350여 조합원은 9일 오전부터 직장폐쇄 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회사 측은 농성 장소에 단전·단수를 하고, 농성자들의 화장실 출입도 금했다. 회사 측은 결국 "회사 측 안을 수용하지 않으면 폐업하겠다"라고 공언했다. 6월 16일 회사 측 안대로 합의했으나 회사는 조합원 신분보장을 약속하지 않았고, 18일 유진희 위원장·오영숙 사무국장·이인영 홍보부장이 연행되어 구속당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충북민주화운동사>, 2011).

꿈틀거리다


1990년 들어 청주공단의 민주노조운동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한주전자에서 시작된 민주노조운동은 인근의 공단 사업장으로 확대됐다. 1980년대 초반까지 타 사업장에 비해 노동조건이 좋았던 AMK는 1980년대 중반부터 동일업종의 타 사업장에 비해 임금 및 노동조건이 열악해졌다.

AMK조합원들은 1990년 임투 교섭내용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조합원들이 집회를 통해 재협상과 어용노조 퇴진을 주장하며 민주노조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회사 측은 집회를 주도한 박선복 대의원을 폭행하고, 여성 조합원들을 조직적으로 폭행했다. 이로 인해 이미자가 안경이 깨지면서 눈이 찢어졌고, 홍선영은 전치 4주의 부상을 입었다. 박미경은 후유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조합원들은 5월 2일 AMK민노추(민주노조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회사 측은 AMK민노추를 와해시키기 위해 조합원간 갈등을 부추겼다. 회사 측은 5월 23일 위원장 직무대행 박필순과 박선복, 김계애 대의원과 박미순을 업무방해로 해고했다. 5월 28일 회사 측은 관리자 30명을 동원해 출근투쟁하는 해고 노동자를 납치해 청주 명암약수터에 내려놨다. 이 과정에서 옷이 찢기고, 신발을 잃어버린 해고 노동자들은 맨발로 청주 시내까지 걸어왔다.

한주전자와 AMK 노동조합 운동의 사례처럼 1990년대 초반 민주노조운동은 폭행과 직장폐쇄, 구속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회사 측의 폭행이 가장 심했던 AMK와 13명의 여성 노동자를 스크럼속에 가두고 한 시간 동안 집단폭행한 뉴맥스, 4명의 구속자를 낸 충북전자가 그런 경우였다. 1970~80년대 정진동이 겪었던 것과 비슷한 길이었다.

폭행과 해고 그리고 구속이 반복됐지만 쓰라린 상처속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싹텄다. 사실 충북지역에서의 민주노조운동이 꿈틀거린 것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꿈틀거림은 자연발생적 투쟁으로 그쳤다. 그 결과 1990년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에 충북지역은 참여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0년대 초반 청주공단의 민주노조운동은 지역 노동운동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1988년 택시 파업을 지원했던 청주산선에 이어 노동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단체가 만들어졌다. 1989년 청주노동문제상담소가, 1990~91년에 한시적인 노동운동 지원조직이었던 국민연합 임투대책반·임투공동대책위원회가, 1991년 해고자 모임인 '일터 되찾기 모임'이, 1991년 12월에 '청주노동자의 집'이 결성됐다.

정진동을 찾은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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