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트 대한민국'을 위한 여성·젠더 의제를 나는 염불 외듯 줄줄 읊을 수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여성가족부 기능 확대 및 강화, 지방자치단체 성평등 추진체계 복원, 비동의간음죄 신설, 낙태죄 대체입법 마련, 성별임금공시제 도입, 젠더폭력 근절 및 예방, 생활동반자법 제정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윤석열 퇴진 광장에서 주구장창 들었던 얘기들이자 여성 당사자인 나의 생애에 맞닿은 의제이기에 별다른 노력 없이도 줄줄 욀 수 있다. 비단 내가 아니어도, 광장에 몇 번 들렀을 이들이라면 누구나가 알 법한 얘기다.
그러나 이것을 정치인의 입으로 한 마디 듣기가 그렇게나 땀이 난다. 사실 지난해 총선 때부터도 성평등 공약은 실종되다시피 했다. 거대 양당은 저출생 해법으로 일·돌봄 균형에 국한돼 있거나(국민의힘), 거기에 성폭력 대응을 조금 끼워 넣은(더불어민주당) 수준이었다. 민주당이 박지현 추적단불꽃 활동가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하며 2030 여성에 소구했던 2022년 대선은 먼 나라 얘기처럼 느껴질 판이다.
'응원봉 부대'라던 상찬은 어디 가고… 빛의 혁명에는 "모든 국민이?"
6·3 조기대선을 앞둔 현시점은 더욱 참담하다. 탄핵 광장에서만 해도 '응원봉 부대'라며 청년 여성들을 치켜세우더니, 파면이 되자마자 입을 싹 씻는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지난 11일 "광장을 주도했던 2030 여성들에 대해선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2030 여성 유권자를 위한 비전은 어떻게 구성하고 있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빛의 혁명 과정에는 모든 국민이 함께 했다"라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홍준표 전 국민의힘 경선 후보는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며 차별금지 대신 '격차 해소'를, 페미니즘 보다 '패밀리즘' 같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클릭' 심화는 사실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 표결 당시 국민의힘 이탈표가 12표밖에 안 나왔을 때부터,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이 탄핵 반대 집회에 모습을 드러내 지지를 구걸할 때, 탄핵에 반대한 인물들이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 출마했을 때 우리는 국민의힘이 '건전 보수'를 넘어 극우 세력을 대변하고 있음을 체감했다. 여기에 화답하듯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먹고사니즘'과 '잘사니즘' 같은 경제 구호를 내세우며 광폭 우클릭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정치권이 성장 담론에만 목매는 사이, 젠더 기반 폭력과 여성혐오범죄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 사이 서울 미아역 인근의 마트에선 30대 남성이 흉기를 휘둘러 일면식도 없는 60대 여성을 살해했다. 인천에서 사실혼 관계인 50대 여성을 살해한 50대 남성이, 경기 수원역 인근에서 60대 여성 행인을 폭행한 20대 남성이 구속됐다.
차별은 낙인, 낙인은 곧 격차다
광장의 속도에 비해 제도권 정치의 속도는 매우 느리다. 젠더와 성평등에 한해서는 더욱 그렇다. 배우 윤여정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첫째 아들이 동성애자임을 밝혔고, 저스트비(JUSTB) 배인은 K-팝 아이돌 최초로 커밍아웃을 했다. 그보다 전에, 수많은 퀴어들이 퇴진 광장의 시민 발언대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