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에 조선 팔도를 강타한 정여립 역모 사건은 2시간짜리 내란도 아니었다. 역모가 고발됐을 당시에 정여립은 반란에 착수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단 1분도 내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내란 수괴로 간주됐고 이 사건은 역사적인 정권교체로 이어졌다.
당쟁사를 정리한 이건창(1852~1898)의 <당의통략>은 "사람을 보내 여립을 체포하려 하니 여립이 달아났다"라며 "팔도를 크게 수색하니 여립이 스스로 찔러 죽었다"라고 기술한다. 남하정(1678~1751)의 <동소만록>은 "여립이 진안군 죽도 절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이 현감과 같이 두들겨 죽이고는 자살했다고 아뢰었다"라는 내용을 알린다. 어느 기록이 맞든, 실제로 나타난 장면은 정여립이 역모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그냥 도주하다가 죽는 장면뿐이다.
1589년 11월 9일(음력 10.2) 밤에 황해도관찰사의 비밀 장계를 통해 알려진 것은 정여립을 앞세운 반란세력이 서남 지방에서 거병해 한양으로 북진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역모가 준비됐는지는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논쟁적인 주제다. 확실한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주인이 있겠는가"라며 "누구든 능력 있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또 대동계라는 무사 조직을 지휘했다. 선조 22년 10월 1일자(양력 1589.11.8.)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대동계는 1587년에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에 따라 왜구 격퇴에 동원됐다.
군사조직을 갖춘 인물이 혁명적 사상을 품었으니 반란을 꿈꿨다는 의심을 받을 만도 했다. 그러나 대동계를 왕조를 전복하는 비밀결사가 아니라, 왜구를 격퇴하는 의병부대로 활용했다. 그러니 조작 사건이라는 의구심을 가질 만도 했다.
정여립 역모 사건으로 보는 왕조시대의 정권교체
왕조시대의 정권교체는 대통령제보다는 의원내각제 하의 정권교체와 유사했다. 군주보다는 조정 핵심 세력의 변동이 정권교체의 바로미터였다. 군주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지만, 권력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최종 목표는 일반적으로 군주 교체가 아니라 조정 교체였다.
정변을 주도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도 군주 자리를 노리지는 않았다. 그것을 노리는 사람들은 혁명가들이었다. 성공한 정변의 지휘자가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은 영의정 같은 정승이었다. 왕조시대 사람들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며 이 자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비(非)왕족의 입장에서는 그 자리가 대통령직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정여립 사건에서도 군주는 바뀌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로 인한 정권교체의 위력은 태풍급이었다. 이 사건은 조정 주도 세력을 크게 바꿔놓았다. <당의통략>은 "사건을 처리한 지 1년이 넘도록 동인들을 엮어 처벌해 천(千)을 헤아렸다"고 말한다. 약 1천 명의 동인당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동인당의 씨를 말릴 뻔했던 사건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