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식물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은 아닙니다. 관심은 있지만 깊이도 없고 자격증이나 이 분야에 대한 학위를 가진 것도 아니고요. 나무와 풀이 자라는 이 공간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며 일하고 느끼는 과정을 차곡차곡 경험하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에릭 호퍼가 <길 위의 철학자>에서 말한 '배워가는 인간'입니다. '배운 인간'이 아니고요.
시골에 들어온 지 햇수로 3년 차, 5도 2촌 생활까지 합치면 만 4년이 다 돼가는데요. 무엇보다 어려운 건 여전히 식물들 이름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죠. 처음엔 죽단화를 황매화로 오인했고, 뜰보리수와 보리수를, 파드득나물을 참나물과 혼동했습니다. 최근엔 친구와 통화하며 "거 잔디마당에 섬잣나무 있잖아, 거기 키 큰 향나무 옆에"라고 묻는 말에 "아니, 오엽송은 있어도 섬잣나무는 없는데?"라고 기가 찬 얘기를 주고받았죠. 별칭인데 말이에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갈팡질팡합니다. 낯익지만 이름은 모르고, 아예 낯선 식물도 부지기수입니다. 사실 알아도 안다고 말 못 하겠습니다. 흔한 철쭉도 다 같은 철쭉이 아니고 친숙한 목련도 그렇습니다. 튤립이나 수국, 장미처럼 인기 있는 식물은 인위적 교배종이 셀 수 없이 많아서 그 이름을 다 기억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텃밭에서 키우는 채소도 그렇죠. 애호박과 단호박, 맷돌호박을 구분하는 정도가 제 수준입니다.
호칭이란 게 참 묘해서 상대와의 친밀감에 영향을 줍니다. 이름을 모르면 그냥 풀꽃이고 나무인 것이, 이름을 알면 왠지 가깝게 느껴집니다. 멍석딸기, 뽀리뱅이, 꽃다지, 흰말채나무처럼 모르던 식물을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정원이 넓어지는 느낌도 듭니다. 우쭐해지며 지적탐구욕도 충족되고요. 자기만족이죠. 물론 잘못 부른다고 그 식물의 정체성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름을 모르면 다른 사람들과 소통이 잘 안 됩니다.
한때는 수피와 잎만 보고도, 아니 꽃을 보고서라도 "아, 이 나무는 말이야..." 하고 아는 척할 수 있기를 욕심냈습니다. 시골에서 보낸 시간이 있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모르는 식물 투성이라 구글 AI와 네이버에 묻곤 하는데요. 얘네들도 헷갈리는지 어떤 경우엔 물어볼 때마다 답을 달리 해서 서로 답답해하곤 합니다. 특히 씨앗이 날아와 저절로 자란 나무와 풀들이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