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커플이 있다. 14년 열애 끝, 헤어짐을 앞둔 남녀다. 말이 14년이지 웬만한 부부보다 더 산 둘이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도 남았을 사이, 세상 가까운 친구이자 연인인 두 사람이 그 관계의 끝을 고하고자 한다.
만나면 헤어지는 게 인간사 순리다. 그러나 끝 앞에 초연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때가 되어 보내는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통곡하는 게 우리 인간이다. 하물며 인생사 한창 가운데 갈라져서 각자 볼일 보자는데 웃으며 헤어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둘의 마음이 한날한시에 꼭 같이 소실되는 경우는 세상에 얼마 되지 않는다. 어느 쪽은 마음이 한 스푼쯤 더 남았고, 어쩌면 스푼이 아니라 국자, 아예 대접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이별이 어찌 담담할 수 있을까.
여기 이 커플은 14년의 열애 끝에 깔끔한 갈라짐을 준비하는데, 나름대로 철학에 기반한 일이라 한다. 저들 자신의 철학은 아니고, 현대 철학을 즐겨 읽는 여자의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해왔다는 말이라고. 연인 간에 진정으로 축하받아야 할 일은 만남이 아니라 헤어짐이라는 이야기. 헤어짐이란 둘이 더는 관계로써 행복할 수 없다는 것으로, 헤어짐이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라는 얘기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기꺼이 오늘의 문제를 타파하는데 어떻게 축하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의 중심 이야기다.
차기 거장 손꼽히는 트루에바의 신작
감독 호나스 트루에바는 이 시대 주목받는 젊은 영화인이다. 1981년생으로, 이제 40대 중반인 그가 언젠가 세계 최상급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는 작품을 찍으리란 데 적잖은 이가 뜻을 같이한다. 스페인 출신인 그는 빅토르 에리세, 페드로 알모도바르,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등 십수 년 상간으로 굵직한 이름들이 등장한 스페인 영화의 후기지수 중 제일로 지목돼 왔다. 2019년 작 <어니스트 버진>과 2021년 작 <누가 우릴 막으리>가 이 시대 재기 발랄한 작가 한 명이 등장했음을 알린 가운데, 신작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는 지난해 제77회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돼 최고상에 준하는 유로파 시네마 라벨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트루에바는 그저 유망주를 넘어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는 주변에서 가장 이상적인 커플이란 평가를 한 몸에 받는 알레(잇사소 아라나 분)와 알렉스(비토 산즈 분)의 이야기다. 성격이면 성격, 취향이면 취향, 그야말로 모든 게 잘 맞아 천생연분이란 말이 절로 나오던 이 커플이 어째서 헤어지기로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둘은 헤어짐을 작정하고 있고, 어쩌다 말이 나온 김에 이별파티를 제대로 열어보기로 결정한다. 결혼식은 아니더라도 이별파티 한 번은 제대로 열자고, 주변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을 모아보자고 말이다.
영화는 알레와 알렉스가 파티에서 연주할 연주자부터 참석할 친구들까지 한 명씩 섭외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알레는 영화감독으로 신작을 준비 중에 있고, 배우인 알렉스는 다음 작품을 고르는 데 열중이지만, 무엇도 이별파티보다 큰 일이 될 수는 없다. 자칫 이별파티가 엉망이 되지 않도록 마치 결혼식처럼 세심히 준비하는 과정이 어딘지 낯섦 가운데 익숙함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