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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에 이런 데가 있다고? 나만 몰랐나
2025-05-04 11:33:42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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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한 연못인데, 물이 마르지 않는다. 채 1만㎡ 남짓 이 못물이 십수만㎡의 농토를 적셨으니, 백성들은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못 한가운데 초가를 인 검박한 정자가 오롯하다. 못은 골정지(骨井池)고 정자는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다. 두보의 시 구에서 빌어 온 '하늘과 땅 사이 하나의 초정'이라는 의미다.


문체반정이 있었다. 1792년이니 조선 르네상스가 한창 만개하던 때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스테디셀러가 되어 선풍적 인기를 끌자, 정조가 "문장이 경박하다. 순하고 참된 고문으로 돌아가자"라며 일으킨 일종의 문예 운동이다. 후속 조치로 규장각을 강화하여 순정한 고문 출간에 힘쓰는 한편 잡문 등의 수입을 일절 금지한다.

잡문을 읽다가 발각된 김조순을 비롯하여 연암과 이옥(李鈺)에게 자송문을 지어 바치라 명한다. 일종의 반성문이다. 이를 잘 써내어 김조순이 출세했을까? 노론인 그는 나중 세도정치 시기 안동김씨 권력의 핵심으로 등극한다.

하지만 연암과 이옥은 이에 반발한다.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한 이옥을 왕은 맨 꼴찌 급제자로 둔갑시킨다. 결국 이옥은 벼슬을 포기하고, 자유로운 문체를 선택한다. 연암도 마찬가지다. 죄가 커 자송문을 쓰지 못하겠다며 버틴다. 56세에 이르도록 굳어진 글 짓는 습관이다. 열하일기 같은 누대의 명저를 쓴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라니, 이는 누가 보아도 억측으로 보였을 터이다.

하지만 이면엔 정조의 노림수가 있었다. 남인 위주인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노론의 파상적인 공격과 논지를 다른 쪽으로 돌려놓기 위한 전술이라는 평가다. 노론이지만 북학파로 가톨릭에 유화적인 연암을 볼모로 삼아, 노론의 공격을 다른 쪽으로 돌려세우려는 방책이었다. 당시 연암은 경상도 안의 현감이었다.

면천 군수

벼슬에서 물러난 연암을 1796년 왕이 면천 군수에 임명한다. 여러 가지 복선이 깔린 부름이다. 하나는 내포지역에 빠르게 확산하는 가톨릭의 실체를 파악하고, 대비책을 찾을 필요에서다. 둘은 가톨릭에 기반한 실학사상으로 무장한 연암의 능력과 경륜을 묵혀두기가 아까워서다. 셋은 문체반정에도 도무지 반성문을 지어 올리지 않는 연암의 고집을 꺾어 보려는 심산이다.


연암이 가톨릭을 어찌 보았는지는 그의 행적에서 찾을 수 있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이 신분제 질곡에서 쉽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바탕을, 가톨릭이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간파했을 터이다. 당시 정치 상황이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나 극악한 탄압으로 이어지는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신자들 위주로 설득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1800년 이후 가톨릭 박해에 희생당한 면천 백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 그의 행적을 뒷받침한다.

정조의 신도시 수원 화성처럼 농사에 필수인 수리 시설을 우선 개선해 낸다. 골정지는 읍성 동문 밖에 있다. 몽산(蒙山)이 만든 골을 따라 작은 물길이 여럿이다. 버려진 연못을 준설하고, 그 물길이 한곳으로 모이게 만든 게 골정지다.

또한 지금의 면천저수지 동쪽에 농사에 쓸 물을 가둬두는 제방이 있었는데, 큰물이 지면 제방이 유실되곤 했다. 순성면 양유리에 있는 양제라는 제방으로 남원천 상류다. 이를 둘러본 연암이 옛 수로를 막고, 바위가 많은 곳으로 수로를 돌리자 수해가 사라진 일화도 전한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끝내 반성문 쓰기는 싫었나 보다. 왕도 채근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신 농업 기술에 있어 중국의 선진기술을 도입하고, 재래의 농사 경험과 기술, 정책을 개량하자는 주장을 담은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써낸다.

그 방책으로 토지 소유 상한선을 정해 그 이상의 토지 매점을 엄금함으로써 토지 겸병의 폐단을 없애자는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같은 개혁정책을 이 저술에 담아낸다. 왕이 이를 반성문 대신으로 인정했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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