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전파관리소 관사 옆에서 수습된 유해가 9일 현재 90여 구로 늘어났다.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후퇴하자 지역우익들이 '북한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민간인들을 집단 살해해 암매장한 곳이다. 현장은 당시 살인이 무분별하게 자행됐음을 보여준다.
발굴 현장(더한 문화유산연구원 발굴)에는 가로 5m, 세로 7m(깊이 약 4m) 정도의 좁은 구덩이에 유해가 켜켜이 쌓여 있다. 유골 밭이다. 뒤엉켜 부서진 유해의 참혹한 모습은 눈을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애초 수십 여구로 추정하고 시작된 유해 발굴은 9일 현재 약 90 여구로 늘어났다. 지난 4월 3일 시작된 유해 발굴은 훌쩍 한 달을 넘겼다. 이에 따라 당진시는 추경을 통한 시비를 확보(2200만 원)해 발굴 기간을 6월 중순까지 재연장하기로 했다. 당초 예산은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8200만 원을 지원받았다.
충남의 대표적 곡창지대... 일제강점기와 연결된 지역 갈등
유해를 발굴 중인 송산리 전파관리소(우강면)는 합덕읍과 접해 있다. 충남의 대표적 곡창지대인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지주와 소작농, 부재지주의 토지를 관리하는 마름과 소작농 간 일본인 지주와 소작농 간 갈등의 골이 깊었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지주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당진 지역 소작쟁의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경찰은 소작농들의 집회를 금지하고 소작 조합원들을 잡아들였다. 소작농들의 비참한 생활고는 1931년 일본의 만주 침공으로 시작된 식량 공출과 강제 부역으로 최고조에 이른다. 당진 주민들은 이에 맞서 소작쟁의와 청년회 신간회 활동으로 맞선다.
해방이 되자 당진 지역은 '농지를 농민에게 돌려줘야 한다'(토지 소유관계 개선)는 강령을 내건 건국준비위원회와 후신인 인민위원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브루스 커밍스는 충남 당진의 급진성 지수를 14로 평가했는데 이는 당시 충남 14개 시·군 중 홍성과 예산, 서산과 함께 가장 높은 수치다. 브루스 커밍스는 '갈등이 빈발한 지역은 급진성 지수를 10점, 인민위원회가 지배적인 지역은 6점을 주는 방식으로 지수를 평가했다. 미군정청 자료를 보면 해방 직후 당진의 소작률은 74%에 달했다.
해방 후 미군정의 실패한 토지정책에 맞선 시위 빈발
1945년 11월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 자료에 따르면 전국 447정보의 토지 중 261정보(58%)를 전체 농가(305만 호)의 3.3%가 차지했다. 대다수 농민은 5, 6할에 이르는 고율의 소작료로 궁핍한 상태였다. 1946년 미군정청의 대규모 탄압 때에는 당진군인민위원장(배기영)을 비롯해 간부 7명이 구속(공무방해 등 혐의)됐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때 청년회나 신간회 활동을 했다. 특히 배기영은 당진 소작조합에서 활동했다.
1945년 12월 열린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 때에는 당진군에서 3명이 대의원 자격으로 참여했다. 이중 주윤흥은 충남을 대표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1946년 10월에는 미군정청의 미곡정책의 실패에 따른 쌀 공출 폐지와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시위(10월 항쟁)가 당진읍과 합덕읍·면천면에서 일어났다.
미군정청은 경찰을 동원해 항쟁에 참여한 좌파 지도자들을 투옥하는 등 뿌리뽑기에 나섰다. 우익단체를 내세워 인민위원회에 대한 테러 공격도 지속됐다. 결국 인민위원회는 분쇄됐다. 당진군인민위원회도 우익단체(독립촉성당진군협의회)의 공격에 결국 사무실을 폐쇄하고 지하활동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