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세부 전공이 같은 한 동료와 했던 논쟁을 기억한다. 그는 한국에서 의료에 대한 국가 개입이 대단히 부당하며, 사회주의적 제도가 한국 의료의 가능성을 잠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 고급의 의료를 위해서는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하고, 이제 한국에는 이런 의료를 구매할 수 있는 사람이 충분히 있는데도 국가가 이를 막는 후진국형 의료 제도가 운용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동의할 수 없었던 나는 반론했다. 방금 말한 고급 의료의 나라, 미국을 보라고 말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미국은 국가가 의료에 대해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민간의료보험은 매우 복잡해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은 불가능하고 보험료는 아주 비싸다. 건강보험 없는 사람이 여전히 많고, 보험이 있어도 어디까지 적용되는지 환자가 미리 예상하기 어려워 병원에 선뜻 가기도 어렵다. 그런 미국에서는 한국에 비해 의료비를 훨씬 더 많이 쓰지만 사람들의 평균 기대여명은 우리보다 한참 짧다.
그는 다시 주장했다. 미국의 의료는 매우 우수한데, 비용 문제로 접근이 어려운 사람들이 있어서 평균적으로 건강 결과가 나쁠 수 있지만 그건 다른 문제로 보아야 한단 거다. 그러면서 그는 전체 인구집단이 아니라, 미국의 소득 상위 10%와 한국의 소득 상위 10% 집단을 선별해서 이들의 기대여명을 비교하면 미국이 더 높을 수 있다고 말했다. 첨단 기술을 활용해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국의 '의료' 자체는 우수하다는 굳은 믿음이 담긴 얘기였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의료 기술 우수하다는데 왜 미국 사람들은 일찍 죽을까?
2021년 출판된 한 연구는 이런 궁금증을 풀어준다. 이 연구에서는 소득 상위 1%와 5% 지역(county)에 거주하는 부유한 백인 시민과 다른 고소득 국가 시민의 건강 결과를 비교했다. 영아사망과 모성사망, 유방암과 대장암 5년 생존율, 급성심근경색의 30일 치명률처럼 비교적 의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결과 변수를 활용해 12개 고소득 국가(호주, 캐나다, 핀란드, 스웨덴, 프랑스, 독일, 일본 등으로 아쉽게도 한국은 포함되지 않았다)와 미국의 부유한 백인 시민의 상황을 비교했다.
놀랍게도 부유한 미국의 백인 시민들은 다른 나라의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많이 죽고 있었다. 영아사망과 모성사망은 상위 1%와 5% 지역에 거주하는 미국 시민에서 여타 국가들보다 훨씬 더 많이 발생했다. 급성심근경색을 앓고 30일 내에 사망하는 사람도 비교 대상 국가 중 제일 많았다. 대장암 생존율은 비교 대상 국가 중 중간 정도 수준이었고, 유일하게 가장 우수한 성적을 보였던 것은 유방암 생존율뿐이었다(선진국 평균 시민과 미국 특권층 시민의 건강 결과 비교).
미국의 건강 수준이 처음부터 나빴던 건 아니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기대여명이 꾸준히 증가하던 1950~60년대 미국 남성들은 평균 정도, 여성들은 다른 나라보다 기대여명이 더 긴 편이었다. 본격적으로 뒤처지기 시작했던 건 1970년대 후반 정도부터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해 복지와 공공지출을 줄이고 국가가 운영하는 건강보험을 도입하려는 시도를 무력화하며 의료의 상품으로서의 성격을 승인, 강화하던 시기의 정체를 그저 우연으로 보긴 어렵다. 이후 미국과 다른 국가 사이의 건강 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졌고 지금도 여전하다.
워낙 건강 결과가 나쁜 것으로 유명하다 보니, 다른 고소득 국가와 비교해 미국에서 사람이 얼마나 더 죽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도 있다. 예컨대 이런 연구 질문이 가능하다. 미국의 사망률이 다른 잘 사는 나라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몇 명이 더 살 수 있었을까? 즉 초과사망을 계산하는 거다. 가장 건강 결과가 좋은 일본과 비교했을 때 2016년 미국에서는 88만 5000여 명(여성 52.9만 명, 남성 35.6만 명)이 더 죽었다(다른 18개 고소득 국가와 비교한 미국의 초과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