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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9명이나... '빨간 베레모' 그 남자가 포기 못한 이유
2022-05-28 20:33:10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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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전후로 국가가 저지른 대규모 민간인 학살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 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는 정치 사회뿐 아니라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존재한다.

영화 <바람난 가족> 도입부에서 변호사인 황정민은 차를 몰고 어느 산골짜기로 향한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포클레인을 동원해 유골을 발굴하고 있다. 곧이어 작업을 중단시키기 위한 경찰들이 들이닥치며 유가족들과 소란이 벌어진다.

이때 유가족들 중 빨간 베레모를 쓴 한 노인이 잠깐 스쳐 지나간다. 보조 출연자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는 문경 석달마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생존자이자 진실 규명을 위해 평생을 바친 채의진이다.

한겨울의 토요일 오후, 문경 석달마을

1949년 12월 24일 정오 무렵, 문경 석달마을에 70여 명의 군인이 들어온다. 이들은 태백산 일대 빨치산 소탕을 위해 나선 태백산지구사령부 예하 2사단 25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와 3소대 소속이었다.

부대는 인근 지역의 정찰 임무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에 들어선 그들은 더 이상 정찰대가 아니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빨치산 내통자, 빨갱이라고 윽박지르며 집집마다 불을 지른다. 그리고 마을 앞 논으로 주민들을 불러 모은다. 곧이어 주민들을 향해 기관총과 소총을 쏘았다. 1차 사격 후 생존자들을 일으킨 다음 다시 사살한다.

잠시 후 마을 청장년 몇 명이 마을로 돌아오던 중 입구에서 몇 명의 군인들을 만났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곧이어 방학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마을 아이들도 이곳에 도착한다. 그리고 군인들은 청장년들과 아이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아이들은 쓰러졌고, 몇몇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깔리며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난 아이들 중 한 명이 채의진이었다.

사건 이후, 정부의 대처

이날 마을에 있던 24채의 가옥이 모두 불탔다. 그리고 주민 127명 중 86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가까스로 살아남은 41명 중 12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불과 29명(22.8%)였다. 사실상 마을 하나를 통째로 없앤 것이나 다름없었다.

희생자 중에는 65세 이상 노인이 10명, 여자가 42명이었다. 그리고 12세 미만의 어린이가 26명이었는데 첫 돌이 지나지 않은 아기가 5명이었다. 일가족 전체가 희생된 집도 5가구였고, 6가구는 대가 끊겼다. 채의진은 9명의 가족과 친척을 잃었다.

사건 직후, 군 내부에서는 이 사건을 무장공비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 보고한다. 하지만, 정부는 곧 해당 사건을 한국군이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사건을 은폐하고자 했다. 그래서 신문에도 공비 70명이 마을 주민을 죽였다고 나왔고 이는 큰 화제가 되었다. 당시 사건 직후 문경 경찰서는 자체 조사에서 석달마을은 공비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런 조사 결과는 묵살되었다.

1950년 1월 17일, 김용 초등학교에 신성모 국방장관이 방문한다. 그는 석달마을 주민들에게 100만 원을 건넨다. 그런데 이 돈은 배상이나 보상금이 아닌 위로금이었다. 이는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었고, 이 사건을 계속 공비가 저지른 것으로 호도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장관은 유족들과 사람들 앞에서 해당 사건은 공비가 저지른 것이며 한층 더 투철한 반공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정부의 은폐 시도 와중에도 미군은 이미 가해자가 한국군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별도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그 기록이 1997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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