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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3개월도 안 돼 파국... 차이콥스키 평생 증오하며 산 아내
2024-05-02 15:00:44
김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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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위대한 예술작품, 고전의 반열에 오른 문화적 유산을 통해 일상의 지루함 혹은 삶의 험난한 고비를 극복하고 초월할 힘을 얻는다. 하다못해 일시적으로나마 그런 주박에서 해방되어 다른 여지를 찾을 수 있는, 말 그대로 숨 쉴 틈을 선사받기도 한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아름답고 정교한 것, 초월적인 존재들의 위력은 강렬한 체험으로 남곤 한다. 그런 예술적 성취에 경탄하다 보면 대체 어떻게 이런 작업이 가능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런 호기심은 자연스럽게 작품의 탄생 배경과 작업 과정, 궁극적으로는 예술가에 대한 관심으로 귀결된다. 결국엔 그 모든 게 사람이 빚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수순은 종종 예정된 모순에 봉착하고 만다. 아름답고 숭고한 작품, 희망찬 미래를 예견하는 수많은 명작의 창조자가 자신이 창조한 결실과 전혀 닮아 있지 않거나 극과 극을 달리는 삶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대개 애써 인간적 허물을 외면하거나 강변하곤 한다. 그 모순된 상황을 수긍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하지만 그런 필사의 노력은 어느새 진실을 왜곡하거나 떼어낼 수 없는 것들을 강제로 분리해버리고 만다. 결과를 낳은 과정과 주변 배경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인데 인위적으로 조작하려드니 본질의 훼손은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여러 다양한 욕망과 이해관계에 의해 그런 곡해는 현재진행형으로 곳곳에서 목격된다.

특히 국가적 위인이나 민족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이들은 그런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갇혀 박제가 되기 좋은 대상이다. 그런 상징적 존재를 활용해 민족/국가 정체성을 수립해 왔거나 사회를 통합하는 아이콘으로 삼았던 경우 그런 모순이 터지면 곤혹스러운 일이 한둘이 아니긴 할 테지만, 복합적 면모를 지닌 개인을 무 자르듯 좋은 면만 남긴다면 과연 올바른 일일까? 대개 그렇게 실용적으로 착취되는 이들의 위업과 가치는 퇴색하게 마련이다. '박제'란 표현을 괜히 붙이는 게 아니다.

<레토>에서 구소련 시절 개혁과 개방을 희구하던 청년세대의 문화적 상징이자 대변자로 존재했던 고려인 록커 빅토르 최와 그의 밴드 '키노'를 영화화했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이번에는 정반대의 시도에 도전한다. 지금 현재도 소련-러시아 문화 정체성에 거대한 지분을 가진, 아니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러시아 출신 음악가의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가려진 지점을 중심으로 놓은 것이다. 그 대상은 러시아가 자랑하는 음악가 차이콥스키와 그의 아내 안토니나다. 위대한 예술가와 그의 아내 이야기라니,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미래의 관객들은 각자의 상상을 펼칠 테지만, 막상 목격하게 될 작품은 그 상상을 초과하는 충격으로 가득 차 있다.

안토니나, 차이콥스키를 만나다... 또는 모든 불행의 시작

이미 드넓은 러시아 전역에 명성을 드높이기 시작한 차이콥스키는 그가 가르치는 음악원에서 9살 연하의 수강생 안토니나를 만난다. 적당히 먹고 살 만한 조건에서 그저 현모양처가 아니라 사회적 성공과 전업 예술가를 꿈꾸던 안토니나는 우상처럼 숭배하던 차이콥스키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 여전히 귀족가문 영애라면 조신한 현모양처로 신부수업을 받는 게 당연시 여겨지던 1870년대 러시아 제국에서 안토니나는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게 아니라 현대 여성 뺨 치게 적극적으로 (요즘 유행어대로라면) '플러팅'에 몰두한다. 음악원 내에서 차이콥스키의 수업 현장을 몰래 관찰하는 것으로 출발해 스승의 주소를 알아내고 구애편지를 보낸다. 떨리는 가슴으로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안토니나의 표정은 첫사랑에 눈을 뜬 이들의 전형이라 봐도 무방할 테다.

하지만 확실히 안토니나의 애정 표현은 좀 극단적인 데가 엿보인다. 편지를 보낸 수고의 결실로 은사는 그의 집을 방문하고 단둘이 있을 기회를 얻자마자 안토니나는 차이콥스키에게 열정적으로 구애한다. 사랑에 빠졌으며 다른 대상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며, 결혼할 것을 여성이 먼저 나서서 요청한다. 곤란한 표정을 짓던 차이콥스키이지만 자신의 구애를 거절한다면 자살해 버릴 것이라며 배수진을 치고 덤비는 안토니나를 차이콥스키 역시 못 이긴 척 받아들인다. 이제 시행착오를 좀 겪긴 해도 행복한 결혼생활의 시작인 걸까?

하지만 부푼 꿈에 가득 차 결혼에 골인한 안토니나와 달리 차이콥스키의 표정에는 그늘이 지고 아내에게 감추는 속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믿기 힘든 사랑의 결실에 세상 모든 행복이 다 자신에게 모여드는 것 같은 안토니나는 하지만 차이콥스키가 그가 지참금으로 가져올 상당한 액수의 돈과 결혼을 통해 가정을 대외적으로 꾸리는 것에 대한 인정을 목적으로 자신의 구애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모르진 않는다. 하지만 사랑으로 함께 살다 보면 자신이 소망하던 바를 이룰 수 있을 거라며 애써 불안을 감춘다. 하지만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법이다. 안토니나의 열망과는 다르게 신혼생활부터 불길한 조짐이 하나 둘 등장한다.

부부는 결혼 피로연을 갖지만, 남편의 오랜 친구들에 둘러싸인 안토니나는 곧 이들이 무엇인가를 감춘 채 '인의 장벽'으로 자신과 남편을 차단하고자 하는 노골적 의도를 읽는다. 사실 남편의 지인들은 그런 당황스런 의도를 별로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일 정도다. 대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처음에는 예상했던 것보다 자신이 마련한 지참금이 적어 재정난을 타개하지 못한 실망감 때문인가 넘겨짚어 보지만 그건 조각에 불과하다. 이들은 신혼여행을 가서도 통상적인 부부관계를 갖지 않는다. 차이콥스키가 음악에만 몰두할 뿐, 40이 가까운 적잖은 나이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 자신이 적극적으로 성관계를 주도하고자 남편을 유혹했던 안토니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경악한다.

결국에는 결혼식을 치른 지 불과 석 달도 안 되어 이들의 결혼생활은 사실상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파국으로 치닫는다. '트로피 와이프'도 아닌데 안토니나는 그저 겉으로만 부부처럼 행세하는 데 만족할 리 없다. 그러나 아내의 그런 속 타는 심정 따위엔 차이콥스키는 무관심할 뿐이다. 그리고 남편이 자신에게 소박을 맞히는 충격적 상황의 진실을 결국 대면하고 만 안토니나의 이후 결혼생활은 끝 간 데 없이 추락을 거듭할 따름이다. 느닷없이 남편의 지인들이 들이닥쳐 이혼을 종용하지만, 안토니나는 오기로라도 이혼을 수용할 수 없다. 결국에 부부는 남보다 못하게 거리를 벌리고 따로 지내지만 여전히 그들은 공식적으로 신성한 결혼서약을 유지 중인 부부다. 그런 답답한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이들 부부의 파국은 동시대 가장 위대한 러시아 문학의 경이로운 첫 문장처럼,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안나 카레니나>, 1877년, 톨스토이)

위대한 러시아 위인의 은폐된 진실과 마주하는 순간

국내에서도 차이콥스키의 음악가로서의 인지도와 평가는 실로 거대한 경지에 올라 있다. 클래식을 잘 모르는 이라도 한 번 들으면 금방 흥얼거릴 정도로 수려한 멜로디와 접근성 덕분에 차이콥스키의 위상은 나날이 높아만 간다. 워낙 다방면에 족적을 남긴 천재 예술가이기에 지금 현재에도 그의 작품은 끊임없이 공연되고 재생되는 중이다.

하지만 그런 음악가의 사생활은 은근히 별로 알려진 게 없다. 아마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평생의 후원자였던 메크 부인과의 플라토닉 러브 정도일 테다. 부유한 미망인이 재능 넘치는 천재 예술가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것은 물론, 10여 년 동안 1200여 통의 서신을 주고받을 정도로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대한 통찰과 교류를 주고받은 사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실제로 거의 대면한 적이 없었기에 수많은 상상과 함께 당시에 흔히 일어나곤 했던 예술가 애인과 귀족 귀부인의 불륜에서도 자유로웠다. 예술가와 후원자의 관계 중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구현된 이야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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