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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친일 재테크'... 그 재산 다 어디서 났을까
2024-04-28 18:30:51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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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고위층 친일파의 통장 잔고에도 신경을 썼다. 이는 일본의 의리가 좋았기 때문은 아니다. 친일파들의 협력이 없으면 한국을 지배하기 힘들 정도로 민중의 동향이 심상치 않았다. 우호세력을 지켜주고자 주요 친일파들의 재정 상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1894년에 일본은 동학혁명군을 진압하고자 군대를 출동시켰다. 이 군대는 조선 정부군과 청나라군에 이어 동학군까지 제압했다. 하지만 이런 군사적 우위만으로는 조선을 강점하기 힘들었다. 의병 투쟁 등이 만만치 않은 데다가 러시아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견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전면전 방식으로 조선을 강점하기 힘들었던 일본은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에 군대를 해산하고 1910년에 경찰권을 빼앗는 방법으로 대한제국을 약화시켰다. 1894년의 군대 출병으로 우위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일반 민중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래서 친일파들의 협력이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협력을 받자니, 그들이 경제적으로 곤란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이다.

임야 착취에 친일파 참여시킨 일제

일제는 주요 친일파들이 재테크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갖게 만들었다. 이들을 위해 특강도 열어줬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0월 20일에 훗날 한국외환은행(하나은행)이 들어설 조선귀족회관에서도 그런 강좌가 열렸다.

강사는 바다 건너온 사람이었다. 그달 23일 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2면 중간은 그를 혼다 박사로 부른다. 일본 박사인 혼다의 강의를 듣기 위해 이완용 백작 등을 비롯한 저명인사들이 이곳을 찾았다. 기사는 "이완용 백(伯), 박제순 자(子), 조중응 자, 조진태 씨, 윤덕영 자, 조동윤 남(男), 한창수 남, 권중현 남" 등과 일제 식민당국 관계자들을 거명했다.

귀족이 아닌 조진태(1853~1933)의 이름이 백작 이완용보다는 뒤에 있지만, 남작 조동윤보다는 앞에 있다. 또 자작들의 맨 끝이 아닌 자작 조중응과 자작 윤덕영의 중간에 있다. 친일세력 내에서 조진태의 위상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조진태는 재테크 강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해에 62세인 그는 42세 때 공직을 그만두고 20년간 경영과 재테크의 노하우를 축적했다. 그래서 이 시점에는 상당한 경제력과 지식을 갖고 있었다.

혼다는 조진태처럼 부담스러운 수강생을 앞에 둔 상태에서 "국가의 명예를 대표할 귀족의 체면을 유지함에난 차(此)에 상당한 재산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현 상황에서는 국채 등의 채권 투자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일러줬다.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인해 채권 수익이 좋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추천한 것이 "영구(永久)의 세습재산"이다. 영구불변인 산에 대해 투자하라고 권했던 것이다.

혼다는 조선처럼 산이 많은 곳에서는 임업 투자가 제격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광업은 위험하고 공업·상업·수산업은 경쟁자가 많아 귀족의 포트폴리오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일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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