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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을 '파병'으로 서술해 빚어진 일
2024-05-06 11:04:17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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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을 가능케 하는 전제 조건이 충족돼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외교력이 탁월하고 대한제국(1897~1910)의 외교력이 부실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대한제국이 외교를 잘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의 본질은 외교력 여하에 있지 않았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에 일본군은 조선 정부를 돕겠다며 7천 군대를 파견했다. 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입장은 '일본군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고종시대사> 제3집에 따르면, 그해 6월 8일(음력 5.5) 외교부장관인 조병직 독판교섭통상사무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임시대리공사에게 "파병을 정지시킬 것"을 요구하는 조회문을 발송했다.

하지만 다음날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했고, 7월 23일(음력 6.21)에는 경복궁까지 침입했다. 조선 정부의 의사를 무시한 군사행동이었으므로 명확한 침략이었다. 한국 역사학계마저 이를 '파병', '파견' 같은 용어로 서술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침략'이란 표현을 쓰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치부되고 있다.

일본은 경복궁 점령을 통해 조선 정부를 손아귀에 넣은 상태에서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동학군을 진압했다. 그런 뒤 1905년에는 러일전쟁까지 승리로 장식했다. 이것이 1905년 11월 17일의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이어졌다.

일제 침략의 역사에서 1910년 못지않게, 1905년 못지않게, 1894년도 중요하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장악한 이 해는 일제의 군사적 침략이 본격화된 시점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경복궁에 포위된 고종 임금을 구출하려 한 사람들은 당연히 항일투사·독립투사일 수밖에 없다. 국가보훈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임최수(林最洙)도 마찬가지다.

경복궁에 갇힌 고종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하자, 일본이 위협을 가하며 일으킨 참변이 1895년 10월 8일(음 8.20)의 명성황후 시해다(을미사변). 이로 인한 고종의 공포심 내지는 위기감으로 인해 단행된 일이 1896년 2월 11일(음력 12.28)의 아관파천이다. 이날 고종은 경복궁을 빠져나와 아라사공사관(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했다.

아관파천은 '일본의 단독 장악'하에 있던 조선이 '러·일의 공동 장악' 상태로 들어가는 결과를 만들었고, 고종은 이 같은 러·일 세력균형을 활용해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1898년에 러시아가 만주로 눈을 돌리며 발을 떼는 바람에 조선은 다시 '일본의 단독 장악'하에 들어가고, 일본은 이를 기반으로 1904년에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임최수가 역사 무대의 전면에 나선 시점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의 중간이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통해 단 한 번에 궁을 빠져나온 것은 아니다. 그전에도 궁을 빠져나오려다 실패한 일이 있다. 임최수는 실패한 그 일에 가담했다. 미수에 그친 춘생문사건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고종의 신병 확보하기 위해춘생문 사건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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