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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꾼 프랑스 군대를 쫓아낸 결정적 장소
2025-07-20 11:09:37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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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책 한 권을 들고 서울에 온다. 본디 우리 책인 '휘경원원소도감의궤 上권'이다. 경부고속철도(KTX) 사업권을 염두에 둔 유화 제스처다. 병인양요(1866) 때, 강화 외규장각에서 그들이 탈취해간 3백여 의궤 중 한 권이다. 그러면서 나머지도 '반환'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당시 KTX는 기술이전이 포함된 초대형 사업으로 일본, 독일, 프랑스가 경쟁 중이었다. 우리 정서에 일본은 거부감이 심해, 실제로는 독일과 프랑스의 양자 구도였다. 둘 중 누구도 우위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프랑스의 문화재 반환 약속은 결정타였다. 결과적으로 엄청난 이권인 KTX 사업은 프랑스 업체 '테제베'로 낙찰되었다.


그러나 반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KTX가 완공되어 한창 운행할 때까지도 말이다. 우리 외교부는 프랑스에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공문서를 쉬지 않고 날린다. 결국 2010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약속 이행을 확약한다.

이듬해 '5년마다 한국 측의 임대 갱신요청'을 조건으로 145년 만에 우리 품으로 돌아온다. 소유권은 여전히 프랑스다. 약탈 문화재 천국인 프랑스로서는 매우 어려운 결정을 내린 셈이나, 빼앗긴 우리 관점에선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말 그대로 온전한 반환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KTX라는 선진기술을 도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빼앗긴 문화재를 돌려받은 건 어쩌면 행운인지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의궤는 두 나라 사이 얽히고설킨 문제의 실타래를 풀어낸 뛰어난 역사가라 할 만하다.

병인양요는 가톨릭 박해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서 살아남은 프랑스 신부가 베이징 함대에 실상을 알리면서부터다.

프랑스의 철군은 '정족산성 전투'가 결정타였다. 포수가 포함된 470여 조선군에, 서양 총으로 무장한 200여 프랑스군이 사망자와 사상자를 내고 패하면서다. 이로써 전격적인 철군이 이뤄진다. 철군하면서 무참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한다. 외규장각 서적과 각종 문화재, 강화읍성이 이때 초토화하고 만다.

거만한 프랑스

1866년 9월, 북경에서 3척 군함에 6백여 군사를 이끌고 로즈 제독이 한강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와 시위하고 물러간다.

10월에 다시 군함 7척에 1400여 군사로 강화도를 위협, 침공한다. 14일 상륙해 이틀 만인 16일 강화읍성을 점령한다. 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죽었으니, 조선인 9천 명을 죽이겠다고 떠벌린다. 읍성을 점령한 프랑스군이 은괴 십수 상자와 무기 등 전리품을 챙긴다.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의궤 등 각종 서적과 귀중품이 이때 약탈당한다.

17일 조선 정부는 프랑스군에 문서를 보내 가톨릭의 불법성과 선교사 처형의 합법성, 프랑스 함대의 불법 침략을 이유로 철군을 요구한다. 이틀 뒤 로즈는 회답에서 선교사 학살을 비난하며 책임자를 엄벌하고, 전권대신을 파견해 수호조약을 작성해 문호를 개방하라며 맞선다.

26일 문수산성이 점령당하나, 프랑스도 30여의 사상자를 낸다. 문수산성 수비를 맡은 한성근 부대가 끈기 있게 저항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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